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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1 06:01 수정 : 2018.12.21 20:12

[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네가 이 별을 떠날 때
한창훈 지음/문학동네(2018)

솔직히 어린 왕자라니, 좀 식상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은 어린 왕자 탓이 아니라 어린 왕자가 너무 유명한 탓이다. 전직 선장인 소설 속 인물의 말마따나 “지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그 책을 읽지 않은 이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 뿐”일지도 모른다. “네가 네 시에 온다고 하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같은, 말머리만으로도 누구나 아는 문장들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조차 어쩐지 너무 팬시해서 그 아름다움에 생각이 잘 머물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왕자가 다시 우리들의 눈앞에 등장했다면 그건 또 어떤 이유인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작은 섬에서 태어나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듯 선장이 된 남자가 갑자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어린 왕자와의 만남은 한평생 바다를 떠돌다 소중한 것을 잃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의 쓸쓸한 인생에 대한 긍정이자,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위로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렇게 읽고 말기에는 아무래도 서운하다. 남자의 인생이 한낱 허망한 신기루처럼 보이지 않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이 그저 슬픔으로 스러지지 않는 것을 어린 왕자의 동화 같은 위로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위로받지 못한다. 좀 더 설득력 있는 위로가 필요하다.

팔십년이 지나 지구를 다시 방문해서야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가 죽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고, 그러나 팔십년이 지났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지구와 소행성 비(B)612 사이의 거리만큼, 그 사이의 숱한 별들과 우주의 시간만큼 오랜 슬픔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겠다. 그저 슬퍼하지 않고 슬픔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테고, 아주 오래 멀리까지 사라지지 않으므로 곁에 없다 하더라도 어딘가에 있을 이들의 안부를 물을 수 있을 테니까.

몇 날 남지 않은 한해의 끝을 바라보며 좀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자꾸 슬픔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갑판에 앉아 수평선 위에 촛불처럼 남아 있는 노란 노을의 흔적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남기고 간 마지막 숨결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깊은 바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고 스러지는 노을만 봐도 가늘게 흔들리던 촛불을 생각한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 없었던 팔십년 동안, 어린 왕자를 우주로도 데려가고 지구로도 데려왔던 ‘그것’의 조각들은 사막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켰다. 그 조각들과 함께 어린 왕자는 지구를 떠났지만, 떠난 자들의 조각이 여전히 어디선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그 조각들과 어떻게든 힘써 살고 있고, 어딘가의 조각들과 함께 존재하는 오늘은 다행히도 괜찮은 날이다.

이제야 겨우 조금 따뜻해졌다. 슬프고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이 지구와 B612 사이의 아득한 거리만큼 그것을 감싸는 우주만큼 먼 곳으로 흩어지기를. 어딘가에 있어서 다행인 조각들과 함께 사는 오늘이 내내 안녕하기를. 사막의 아름다움을 알고 나서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또 바다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던 어린 왕자의 길고 긴 항해가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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