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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22 06:01 수정 : 2019.02.22 19:11

[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나를 키우는 주인들은 너무 빨리 죽어 버린다’
김초엽 지음(<현대문학> 2018년 9월호)

시가 뭐고?
강금연 외 지음/삶창(2015)

팔이 아파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기대한 만큼 효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침을 맞으며 건강상담 하는 재미에 꾸준히 가고 있다. 지난주에는 갱년기를 잘 지나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갱년기를 잘 지나면 동물로서의 삶이 끝나고 인간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거죠. 인류문명은 할머니들에 의해 발전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좀 과로했을 뿐 저는 갱년기는 아닙니다만,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얼마 전 읽은 소설 때문이었다.

‘나를 키우는 주인들은 너무 빨리 죽어 버린다’의 희진은 서른다섯 살에 우주로 가서 40년이 지나 극적으로 구조되어 귀환했다. 지구로 돌아온 그는 우주의 어느 행성에 인간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자신은 최초의 조우자였다고 주장했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행성의 위치도 지정하지 못하고 생명체에 대한 어떤 기록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난당해 도착한 행성에서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던 시간과 기억을 지키고 싶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할머니는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손녀에게 전하며 남은 인생을 살았고, 그 전언의 기록이 바로 소설이다.

한의사의 말대로라면 할머니는 우주에서 갱년기를 지나고, 진짜 인간으로의 전환기를 맞았으며, 생존의 공포를 넘어 외계의 말을 들었으니, 인류의 문명은 아무도 믿지 않는 할머니의 경험으로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에스에프(SF) 형식의 소설은 인간의 삶과 문명의 미래에 대한 온갖 비유로 가득 차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외계 생명체들의 언어다. 문자 대신 색채로, 문서나 책 대신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는 그들의 언어. 그러니 풍경이 말이 되고 빛과 어둠이 말의 의미를 결정할 터였다. 인간의 가청범위가 넘는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인간의 시각범위로 구분할 수 없는 수만 가지의 색깔로 역사를 기록하고 삶을 전달하는 그들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온전히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였다. 그런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전체를 온 힘을 다해 쓰지 않으면 안 될 테고, 그러니 외계의 낯선 타자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직업에는 할머니가 적임자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할머니 우주인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까.

시를 쓰는 칠곡 할매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여든이 넘어 배운 문자가 할머니들에게 어떤 세계를 열어 주었을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문자를 통해 새로 보이는 ‘경이’야말로 삶과 문자가 합해지면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경지일 텐데, 그건 대여섯살에 문자를 배운 우리가 알 수 없는 우주다. “여 함 보이소/ 내 이름 쓴 거 비지예/ 내 이름은 강금연/ 칼라카이 영감이 없네”. 할머니는 영감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닐까. 영감은 할머니의 이름을 지운 사람일까, 기억하는 사람일까. ‘내 이름은 강금연’이라는 문장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사람. 그러고 보면 시인도 할머니들에게 적합한 직업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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