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2 05:59
수정 : 2019.03.22 20:05
[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황정은 ‘파묘’(<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파묘(破墓). 무덤을 그 자리에 계속 둘 수 없을 때, 거기에 묻힌 유골을 옮기기 위해 무덤을 파낸다. 무덤이 죽어 여기에 없는 사람을 기억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파묘로 인해 그 기억의 장소는 사라진다. 그러나 장소가 사라진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죽은 자를 향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파묘란 무덤을 없애지만 죽은 자를 다시 기억하려는 마음의 의식이기도 하다. 이미 육신은 사라지고 유골 몇 점으로 남은 시신의 훼손을 염려하고 거기에 깃든 그의 삶을 제대로 간직하기 위해서 파묘가 그토록 신중하게 결정되고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사라지지만 그것이 낙담일 수 없고, 새로운 시작이 온전히 처음일 수도 없다.
엄마 이순일과 딸 한세진은 군사분계선 주변에 있는 이순일의 할아버지 묘를 파묘하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이순일은 한국전쟁으로 38선이 오르내리는 와중에 부모를 모두 잃었고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조손간의 관계에 얽힌 사연 같은 것은 굳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이순일은 열다섯에 친척집에 보내져 거기서 중매로 결혼을 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멀고 불편한 곳까지 매년 성묘를 왔을 뿐이다. 그리고 무릎의 연골이 닳아 더 이상 먼 곳까지 성묘를 올 수 없게 되자 파묘를 결정했다.
마지막 성묘라 정성껏 준비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지만 이 마지막 제의는 뜻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모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인부들은 작업을 시작했고, 몇 조각 유골을 찾은 후에도 몸이 불편한 이순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화장(火葬)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유골을 절구에 빻는 사이 다 식은 음식을 놓고 서둘러 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부들이 무례해서도, 이순일의 마음을 무시해서도 아니었다. 짧은 해 안에 서둘러 파묘를 하고 화장을 하기 위해, 몸이 불편한 이순일의 속도를 기다리지 않은 것뿐이었다. 의식과 절차는 마음의 속도를 기다리지 않고, 추억이거나 추모이거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하는 일은 늘 조금씩 어긋나 이렇게 끝인가 싶게 불편하게 마감된다. 다만 그렇게 불편하게 어긋난 절차 안에서 서둘러 마감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할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을 겨우 확인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떻게 추모와 애도는 계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4년 8개월 동안 광화문 광장을 지켰던 세월호 천막이 철거되고 기억전시공간이 그 자리를 이어간다고 한다. 이후 어떤 기억의 공간을 마련할지 논의가 분분하다. 소설의 마지막을 적어두려고 한다. 파묘와 마지막 제의를 마치고 돌아온 한세진에게 멀리 사는 동생 한만수는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한만수가 엄마를 이해 못한 것도 아니고, 누나의 수고를 폄하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효도라는 말을 덧붙이는 순간 한만수의 마음은 엄마와 누나의 마음에서 한 발짝 어긋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낙담할 일은 또 아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면서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다만 그 마음으로 한세진이 엄마의 곁에 있었다. 그 각각의 마음들이야말로 기억의 형식이자 증거가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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