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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2 06:02 수정 : 2019.07.12 19:53

[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제목도 잘 떠오르지 않아 책을 들춰 봐야 했지만 윤흥길의 ‘무제’(霧堤)에 등장하는 문선공(文選工)의 이미지만은 기억 속에 뚜렷하다. 활판인쇄 시대에 낱낱의 글자를 모아 인쇄의 원판을 만드는 일을 하던 문선공은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다. ‘무제’의 조한봉씨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문선공이었는데, 조판의 과정에서 특정한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무제(霧堤)’라는 글자를 집어넣어 관계자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그래서 이름 대신 ‘봉무제 씨’로 불린다. 봉무제 씨의 손을 거치면 ‘신화’나 ‘기계’나 ‘역사’ 같은 단어들이 느닷없이 ‘무제’가 된다. 작품의 주제와 무관하게 나는 이 소설의 문선공을 떠올리며 단정한 문장의 이면에 숨겨진, 문장이 될 수 없는 욕망이나 무궁한 비밀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한 자 한 자 활자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서울국제도서전의 회장에 들어서며 내 발걸음이 대형 출판사가 주를 이룬 에이(A)홀보다 비(B)홀로 향한 것은 결코 배우 정우성 때문은 아니었다.(강한 부정!) 물론 정우성의 북토크가 열리는 부스에 한참 넋을 잃고 서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발길을 더 머물게 한 것은 B홀에 펼쳐진 독립출판물들이었다. 어떤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그림 같았고 어떤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음악 같은 그곳에서 나는 책이 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만나본 기분이었고, 책을 만들어내는 온갖 상상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세 권의 책을 샀다.

제일 먼저 로컬숍 연구잡지 <브로드컬리> 5호를 집어든 것은 반가워서였다. 언젠가 이 칼럼에도 쓴 적이 있는 동네서점에서 처음 만난 잡지가 아직도 호수를 더해가며 여전히 나오고 있는 것이 반가웠다. 그새 판형도 디자인도 바뀌어서 책은 아담해졌지만 테마를 정해 로컬숍 주인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은 여전했다. 서울의 3년 이하 퇴사자의 가게에서 물었다. “하고 싶은 일 해서 행복한가?” “답이 정해진 질문 아닌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다. 다만 행복은 별개 문제인 거 같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따라 걷는 작은 책(구선아 지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뒤쫓다>)을 산 것은 세트로 판매하는 일러스트 지도가 탐나서였다. 인쇄 기계 화보로 만들어진 <한국 레터프레스 100년 인쇄도감>(김진섭 지음)을 사면서는 책을 쓰고 만들고 매장에 나와 판매도 하는 저자의 즉석 사인도 받았다.

그러니까 매대와 서가에 빼곡한 완성된 책만 책이 아니다. 책이 되기 전의, 혹은 책이 되는 중의, 또는 책이 된 후의 이야기들이 또한 각각의 책이다. 월세와 인터넷 요금과 정수기 렌트 비용까지 너무 상세한 가게 주인들의 영수증이, 100년 전 사람 박태원의 책을 읽고 그 책에 답하는 독자의 중얼거림이, 그리고 책을 찍고 자르고 깁는 커다랗고 복잡한 기계들이 모두 내가 읽고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그래서 책은 충분히 좋아할 만하다. 매끈한 제본과 반짝이는 표지로 완성된, 상품으로서의 책에만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가게와 산책과 기계가, 성심당의 빵냄새와 정우성의 미소까지도, ‘봉무제 씨’의 ‘무제’처럼 책의 왕국을 흔들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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