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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49살 중년기에 김병기는 뉴욕주 북부 휴양도시 새러토가스프링스에 정착해 6년간 독신 생활을 하며 화가로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탐구했다. 김병기는 60년대 후반 20세기초 미국 최고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가 설계한 빅토리안 양식의 대저택인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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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는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애넌데일에 있는 ‘유령의 집’ 시절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열기 속에 등장한 히피세대 예술인들과 교유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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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에서 가장 넓은 거실이었던 김병기의 방에 이웃 입주자인 젊은 히피 예술인들이 놀러와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벽에 <애넌데일>(1969년작)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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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는 <애넌데일>(1969년작)에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애넌데일 시절 자유분망했던 열정을 과감하게 표현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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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새러토가 스프링스에서 김병기가 살았던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은 1906년 건축주인 ‘재벌 2세’ 해리 캔들 소(윗줄 맨 오른쪽)가 부인 에벌린 네즈빗(가운데)의 옛 정부였던 건축가 스탠퍼드 화이트(맨 왼쪽)를 쏴 죽인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 이후 흉가로 유명했다. <워싱턴 타임스>(1906년 6월25일치) 보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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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네즈빗은 십대 때부터 빼어난 미모로 모델·가수·무용수·배우 등으로 활동한 20세기초 미국 최고의 팜므파탈이었다. 1906년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을 부른 비극의 주인공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908년 나온 <빨간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몽고메리가 앤의 모델로 삼았던 16살 무렵의 이블린 네즈빗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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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아메리칸 르네상스를 주도한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는 자신이 설계한 뉴욕의 명소 메디슨 스퀘어 가든(사진)의 옥상 극장에서 치정 살인의 희생자가 되면서 훗날 호색한으로 오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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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서울에서 부인이 건너오면서 가장으로, 생활인으로 다시 돌아온 김병기는 그 소회를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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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 평창동의 화실에서 진행된 구술 인터뷰에서 1986년 첫 귀국 전시회 도록에 실린 <깊은 골짜기를 떠나오다>(1971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병기 화가. 사진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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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반대운동 열기 한창
“쓰레기 더미 속에서 히피들 등장” 1906년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 얽혀
수십년 방치 애넌데일 ‘유령의 집’ 입주
유령찾기 소동 끝에 바람소리 확인
6년간 독신생활에 ‘히피왕초’ 소문도 1971년 가족들 합류해 ‘가장’ 복귀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 소회 그려 의학 해부도·건축사무소 제도 등 ‘생업’ <> “훗날 작품에 날카로운 직선으로 반영”
72년 보스턴서 첫 개인전 ‘미국화단 데뷔’
78년부터 10년 지역대학에서 강의도 “1965년 미국으로 올 때 내 나이 49살이었고, 아내는 6년 동안 서울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나이에 새 생활을 개척하기는 무리였다. 한번은 ‘김병기가 미국 가더니 히피 왕초가 됐다’는 소문이 퍼져 아내가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때 새러토가는 업스테이트 뉴욕 히피들의 집결지였다. 아내가 오고 아이들이 오며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대신 생계의 방편으로 기계와 건축 제도를 하기도 하고 동맥 해부도 같은 의학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10년 넘게 했던 제도 드래프팅이 내 작품 속에 자를 댄 것처럼 그어진 직선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란 기계화된 자연을 그리는 데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시간을 갖고자 늦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새러토가에 칩거하며, 들꽃도 그리고, 끝없는 지평선, 외로운 시골 농가도 그렸다. 72년에는 보스턴 폴리아츠 갤러리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고 78년부터 10년간 엠파이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미술지도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김병기, ‘사랑과 반항의 화가’, <뉴욕한국일보>, 1993년 10월23일) [%%IMAGE11%%] ―가족들이 새러토가로 온 이후 상황은 어떠했는가? “아내가 새러토가에 왔을 때는 유령의 집이 아니라 마이클 스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이클은 뉴욕시티발레단의 최고령 무용수였다. 그는 여름에만 새러토가에서 지냈기 때문에 나와 집을 공유할 수 있었다. 6년 만에 만난 첫날 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내 볼을 한 대 때렸다. 그동안 가족을 돌보지 않은 ‘가출 가장’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용서를 받고 새로운 가정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러토가는 여름의 도시다. 뉴욕시티발레단의 여름 본거지였다. 7월 발레단이 오면 여름이 시작되었다. 8월 초가 되면 유진 오르먼디 지휘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왔다. 그러면 미국에서 제일 큰 경마도 시작했다. 사실 미국의 경마는 새러토가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새러토가는 유명 호텔도 많아서 작가들이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쓰기도 했다. 새러토가 카지노는 마차 시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다. 서부 사막의 라스베이거스 혹은 동부의 애틀랜틱시티 등 비행기 시대 이후 새러토가의 명성은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그 명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포테이토칩이란 말도 새러토가에서 나왔다. 여행용 커다란 가방을 ‘새러토가 트렁크’라고 부르는 전통도 남아 있다. 그땐 작품 판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뭔가 돈벌이를 해야 했다. 글렌데일 건축회사에 나가 평면도를 보고 완성된 집 모양을 그려주는 일을 했다. 일종의 조감도이다. 완공 이후의 집 모습을 상상하여 근사하게 그려주니 회사는 나를 특별대우했다. 웬일인지 미국인들은 평면도만 보고는 완공 상태의 집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화가라는 생각을 잠시도 놓을 수 없었다. 하루는 새러토가의 한 화상이 와서 20여장의 내 작품을 매입했다. 헐값으로 팔아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작품을 미국인에게 판다는 사실이 흐뭇하기도 했다. 그때 내 그림은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지역에서 주로 판매됐다고 들었다. 당시 내 그림에는 역삼각형 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십자가도 일종의 역삼각형이었다. 세잔보다 불안한 시대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IMAGE12%%] 1972년 보스턴의 폴리아츠 갤러리에서 ‘미국 데뷔’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유력한 지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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