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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7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이튿날 ‘5·18 광주항쟁’이 터지자, 김대중을 그 배후로 몰아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특히 김대중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 동교동 의전 비서 김옥두를 60일간 고문했다. 1980년 5월15일 전남대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구호를 내걸고 거리시위에 나서려다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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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3회 남산 지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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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밤부터 연행되기 시작한 ‘김대중 사건’ 관련자들은 한계상황을 넘나드는 극악한 고문을 당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내란죄를 꾸며내야 하니 신군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인간성을 난자하는 악랄한 고문이 지하 취조실에서 끝없이 되풀이됐다. 연행자들 가운데 동교동 사람들, 김대중과 가까운 정치인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특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전라도 출신들은 아예 짐승 취급을 당했다. 영혼을 도륙하는 듯한 고문이 연행자들을 죽음 언저리까지 밀고 갔다.
1980년 5월17일 밤부터 연행 시작‘김대중 사건’ 관련자들 줄줄이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 ‘지옥’
‘내란죄’ 꾸며내려 극악한 고문 동교동 의전비서 김옥두 “악마 체험”
하지만 그는 끝내 ‘혐의’를 부인했다
‘김대중이 광주사태 배후’ 거짓 강요에
전남대생 정동년 두차례나 동맥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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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7일 밤 김대중과 큰아들 홍일, 비서들이 줄줄이 연행된 이후 이희호는 생사조차 모른 채 동교동 집에 갇혀 오로지 기도만으로 버텨야 했다. 사진은 그해 9월에야 중앙정보부에서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된 홍일을 면회 가는 모습으로, 늘 감시 기관원들이 동행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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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빨갱이’ 강요에 자살 시도
다친 상태로 계속 고문…파킨슨병 고통 연행자 가족들 생사 모른채 발동동
두달 뒤 구속통지서 받고서야 면회
동교동에 막내 홍걸과 갇힌 이희호
“고립무원 집에서 오로지 기도밖에” 동교동에서 끌려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은 김옥두였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의 방으로 끌려간 김옥두는 팬티까지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복은 고문복이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수사관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 빨갱이 새끼! 왜 잡혀 온지 알지?” 수사관들은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김옥두는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네 사람에게 한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맞았다. 유신쿠데타 직후에도 고문을 당했지만 이번 고문은 그때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김옥두는 사흘 동안 무작정 맞기만 했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사람을 먼저 개처럼 만들어놓자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고문실엔 야전침대와 캐비닛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시계가 없으니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고문 사이사이 가져다주는 밥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옥두가 버티자 더 험악한 수사관들로 교체됐다. 수사관들은 김옥두의 몸을 짓이기며 김대중과 관련된 항목을 하나씩 들이밀었다. 수사관들이 실토하라고 제시한 항목은 열다섯 가지에 이르렀다. 1. 김대중은 빨갱이다. 2.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 번 갔다 왔느냐. 3. 이북에 가서 김일성을 몇 번 만났느냐. 4. 김대중과 관련 있는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명단을 대라. 5. 군부 내 김대중 인맥이 누구냐. 6. 김대중이 학생 선동 자금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느냐. 7. 경제인 중에서 김대중에게 돈 준 사람이 누구냐. 8. 김대중이 재야의 누구에게 운동자금을 얼마나 주었느냐…. 항목 하나하나를 신문할 때마다 고문이 빠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 같았다. 김옥두는 윽박지르는 수사관에게 “왜 김대중 선생님이 빨갱이란 말이냐”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빨갱이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면서 더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김옥두는 “차라리 죽여라” 하고 소리 지르며 의자를 집어 들었다. 수사관들이 야전침대를 해체하더니 받침목을 빼내 패기 시작했다. 야전침대는 침대라는 이름의 고문도구였다. 받침목에 맞아 김옥두의 머리통이 터져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러운 걸레 조각으로 내 머리를 대충 닦고는 의자에 앉혔다.” 수사관들은 김옥두의 두 팔을 뒤로 묶어 다시 수갑을 채웠다. “야, 빨갱이 새끼야. 너 오늘 죽여 버리겠어. 너 같은 놈 하나 죽여서 한강 지하 통로에 내버리면 쥐도 새도 모른다. 네 마누라도 지금 잡혀와 있다.” 수사관의 입에서 ‘마누라’라는 말이 나오자 김옥두는 놀랐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너희들한테 맞아죽어야겠다.” 김옥두는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김대중 선생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일해오신 분이다. 지금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 수사관들은 군홧발로 김옥두의 정강이뼈를 내갈겼다. 그러고는 두 무릎을 꿇린 뒤 각목을 무릎 안에 끼워 넣고 허벅지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못 이기고 김옥두는 비명을 질렀다. 원하는 답을 받아내지 못한 수사관들은 보안사 최고 고문기술자라고 하는 마산 출신의 ‘전 대위’를 불렀다. 전 대위라는 사람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고 김옥두는 회고록에 썼다. 치욕과 고통을 줄 수 있는 온갖 폭력이 너덜너덜한 몸뚱이에 창날처럼 꽂혔다. 5월 말쯤 수사관들이 ‘동교동 방명록’을 가져오더니 김옥두 앞에 펼쳤다. 한 면에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수사관이 말했다. “야! 네가 정동년이를 김대중에게 소개해서 김대중이가 안방에서 정동년이에게 500만원 주는 것 봤지? 여기 와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네가 총무 겸 의전 비서라서 너한테 물어보면 다 안다던데 사실대로 말해라! 이건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간다!” 김옥두는 의전 비서로서 기본 수칙을 이야기했다. ‘첫째, 김대중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초면인 사람은 절대로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둘째, 학생들은 일절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셋째, 단독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김옥두는 “이건 김대중 선생님의 지시사항이라 내가 어길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또다시 주먹과 각목이 날아왔다. 수사관들은 정동년의 조서를 가지고 와 김옥두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봐라. 김대중이한테 500만원 받았다고 쓰여 있잖아! 이래도 거짓말할 거야?” 김옥두가 완강하게 부인하자 수사관들은 정동년 문제 하나를 놓고 5일 동안 고문했다. 김옥두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팔뚝에 링거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이마가 찢어져 일곱 바늘이나 꿰매져 있었고 왼쪽 고막이 터져 진물이 흘렀다. 팬티와 셔츠는 핏물에 젖어 걸레 조각 같았다. 수사관들이 보여준 조서는 정동년이 고문에 못 이겨 쓴 거짓 진술이었다. 허위자백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동년은 교도소로 송치된 뒤 플라스틱 숟가락을 갈아 동맥을 끊는 방식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돈을 주어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각본을 짜 맞추려고 관련자들에게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정동년은 1980년 4월에 동교동을 방문해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는 이유 하나로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썼다. 김대중은 그날 밖에 있어서 정동년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김옥두는 그 지옥의 한가운데서 60일을 버텼다. 볼펜 열다섯 자루가 닳았고 쌓아놓은 진술서의 높이는 15센티미터에 이르렀다. 수천 장의 진술서를 쓰는 동안 김옥두는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씌운 혐의를 한 가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김옥두는 고문의 상처 때문에 세수를 할 수도 없었고 이를 닦을 수도 없었다. 관절이 상해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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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7 쿠데타’로 김대중과 두 아들 홍일·홍업까지 연행당하면서 이희호는 또다시 죽음보다 더한 고난에 놓였다. 사진은 그해 2월 말 사면·복권 뒤 김대중의 프로필 촬영을 위해 동행한 사진관에서 함께 한 삼부자의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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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7일 밤 자택에서 연행된 김홍일은 남산중앙정보부 지하에 끌려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시도까지 했다가 평생토록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사진은 그해 9월 수감된 서대문구치소에서 김홍일이 직접 링거줄과 칫솔을 갈아 만든 십자가.
사진 김홍일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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