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8.10 19:22 수정 : 2018.08.10 19:35

완전 망해 돌아올지, 어쩌면 새로운 기회를 잡아 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무언가 도전하고, 새로운 걸 시작할 때 삶에 적자가 난 적은 없었다는 걸 기억하면 한박자 쉬는 1년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아무리 못살아도 내 한 몸뚱이 먹고살 만큼은 벌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설마 인생 망하겠어?

[토요판] 이런, 홀로!?
캐나다 워홀, 열린 결말을 찾아

완전 망해 돌아올지, 어쩌면 새로운 기회를 잡아 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무언가 도전하고, 새로운 걸 시작할 때 삶에 적자가 난 적은 없었다는 걸 기억하면 한박자 쉬는 1년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아무리 못살아도 내 한 몸뚱이 먹고살 만큼은 벌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설마 인생 망하겠어?

설마 인생 망하겠어?

지난주 난 회사를 그만뒀다. “퇴사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나보다 10여살 많은 상사들은 “퇴사 후 정해진 다음 직장이 있느냐”며 걱정을 내비쳤다. 반면, “퇴사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내 동료들은 “축하한다”며 케이크를 준비했다.(역시 내 직장동료 클라스. 크으… 흠, 내 퇴사를 손꼽아 기다려왔던 건 아니겠지?)

아차차, 회사를 그만두고 뭘 하냐면, 난 캐나다로 떠난다.

한국을 떠나보기로 마음먹은 건 3년 전쯤이었다. 첫 직장을 1년 정도 다니면서 돈벌이의 고단함을 깨달았다. 달빛을 받으며 터덜터덜 퇴근하던 중, 어차피 이렇게 고단할 바에 내가 살고 싶은 다른 나라에서 고생하며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 포털 창에 ‘해외에서 살아보기’ ‘이민’ 등을 검색하다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라는 옵션을 찾고는 외쳤다. 유레카!

그. 러. 나. 역시 인생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3년 동안 비자가 안 나왔다. ‘꺼이꺼이… 난 워홀도 못 가는 운명인갑다’ 하고 직장에 마음을 붙여보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워홀 비자 신청은 찔끔찔끔 계속했다. 워홀 비자 실패(2016년), 또 실패(2017년)… 드디어 성공!(2018년)…. 2년의 거부를 겪고 나서야 허락이 떨어졌다. “캐나다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

험난한 2000년대를 보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괴로운 기억뿐이다. 한국에서 어떤 학생이 안 힘들었겠냐마는 고작 10살인 초등학교 3학년 때도 ‘수학 경시대회’에서 입상해야 한다며 봉고차를 타고 학원에 다녔다. 늦은 오후에 학원에 도착하면 수업을 듣고 문제 풀이를 하고 깜깜한 밤에 집에 돌아왔다.

중학교에 올라갈 때쯤엔 유행(?)하던 종합학원에 다녔다. 그 시절 주변을 둘러보면 종합학원에 안 다니는 친구를 찾기 힘들었다. 종합학원은 매일 학교 끝나고 저녁 먹고 6시쯤 대형 관광버스를 타고 학원에 도착하는, 제2의 학교처럼 운영됐다. 1교시, 2교시, 3교시, 4교시… 자율학습시간…. 밤 11시쯤 학원이 끝났고 집에 오면 12시가 좀 안 됐다.

12시에 집에 돌아오면 한창 성장기라 그랬는지 무척 허기졌고, 엄마는 그 야심한 밤에 밥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소화가 채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새벽 1시.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잠들었던 14살의 기억. 잘 때는 성장통으로 무릎이 시큰하게 아렸다. 그때를 떠올리면 약간 분하다. 잠을 충분히 잤어도 내 키 디엔에이(DNA)는 160㎝를 넘고도 남… 흠, 넘기지 못했을 거라고 믿으면 덜 분하니까 그렇게 믿어야겠다.

주중도 그랬지만 주말 학원은 더했다. 일요일에도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이른 점심을 먹고 또 학원에 갔다. 높은 레벨반에서 공부하는 친구는 그만큼 학원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땐 그게 부럽기도 했다. ‘수학 경시반’ ‘외고 입시반’ ‘과고 입시반’ 등 반 이름도 다양했다. 학원인데도 자기가 원하는 반에 들어갈 수 없었고, 시험 성적에 따라 나누어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은연중에 깔보는, 올려다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 우리는 성적이 인생을 모조리 결정짓는 줄 알았으니까.(물론 결정짓기도 한다, 일부 직업은.)

학원 인생은 고등학교 때 정점을 찍는다. 당시엔 종합반보다 단과반이 성행했다. ‘여기가 수학은 잘 가르친대’ ‘언어는 이 선생님이래’라는 소문이 돌면 선생님을 ‘섭외’해서라도 그 수업을 듣게 하는 게 학부모들의 권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다.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우리는 하룻밤 자고 나면 체력이 돌아왔으니까, 40대 초중반이었던 젊은 부모들은 3년만 고생하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럴 수 있었겠다 싶다. 그래도 이전보다 목표는 확실해서 좋았다. ‘수능’ 그것만 끝나면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수능을 준비했다.

유달리 고분고분했던 나는 하라면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초딩부터 시작된 입시 레이스
학원은 제2의 학교 같았다
수능만 끝나면 된다고 했지만
입시, 취업, 이직, 결혼…

그 숨막히는 레이스 속 순종적인 경주마처럼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남들처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괴로웠다. 같은 돈, 같은 시간, 같은 체력을 투자하는데 결과적으로 성적은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흘리는 땀은 더 무의미해 보였다. 10여년을 넘게 달려온 이 레이스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스무살, 대학에 들어갔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대학생 초반 2년은 행복한 허니문 기간이었다. 어른들 말대로 그냥 놀았다. 눈 깜짝할 새 2년을 보내고 나니 ‘레이스’는 하나하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소서, 토익, 토익 스피킹, 인적성 검사, 3차 면접으로 구성돼 준비 기간이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대기업 취직 레이스’, 좋은 직장(좋은 직장이란 먹고살 만큼의 충분한 월급을 주는 직장을 말한다)에 들어가는 데 실패해 멘탈 털림을 감수하는 ‘이직 레이스’, 부끄럽지 않은 예식장과 아파트를 준비하려 피똥 싸게 노력해야 하는 ‘결혼 레이스’ 등 앞으로의 레이스가 즐비했다. 그 레이스를 헉헉대며 따라가야 할 내 모습이 훤했다.

멘탈이 ‘쿠크다스(비스킷) 바사삭급’인 나는 이런저런 레이스를 거치면서 단단해지기는커녕 ‘개복치’가 되어갔고, 결국엔 퓨즈가 나가버렸다. 한 기업의 자회사 정규직이었다. 모회사의 반밖에 안 되는 자회사 월급에 매달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여기 계속 머무르면 이정도 돈 받고 얼렁뚱땅 살다가 나이 먹고 죽겠네? 레이스 탈출을 결심한다.

동생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언니 여기서 살아보니까 돈은 많이 못 벌어도 마음은 편해.”

캐나다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1년을 살고 있던 친동생이다.

동생은 나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야말로 동생은 비교적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일궈나갔다. 내가 ‘학원 레이스’를 뺑뺑이 돌며 헉헉거릴 때 동생은 집에서 아이스크림 쭉쭉 빨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게 있다 싶으면 학원에 등록했다. 일본어 학원, 태권도 학원. 그래서 결국 ‘대학 레이스’에선 남들이 말하는 ‘실패’를 겪었고, 가끔은 인서울 대학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하긴 했지만 동생은 동생만의 행복을 찾아갔다. 작은 광고회사에서 1년 인턴 생활을 하고는 한국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두려움 없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레이스는 끝없이 이어졌고
‘멘탈’은 ‘개복치급’이 되었다
어차피 이렇게 고단할 바엔…
회사를 그만뒀다, 캐나다로 떠난다

캐나다에서 동생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다. 넉넉지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월세에 통신비와 식비는 충분히 댈 수 있었다. 가끔은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가기도 했다.(그게 가능했다.) 비교해보니 동생의 한달 월급은 내가 한국에서 ‘쌔빠지게’ 고생하면서 버는 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트레스로 머리카락 숭숭 빠지면서 간신히 모아들인 그 귀중한 월급과.

캐나다에선 서로의 삶에 참견하는 게 적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너 나이가 얼마야, 너 나이가 얼만데 지금 이런 일을 하니, 만나는 사람은 있어? 결혼은 안 해? 이런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한국 사람이라도 이런 질문을 쉽게 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내가 남들보다 잘사는 건지, 경쟁에서 뒤처진 건 아닌지 이런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아서 한국보다 편하다고.

물론 캐나다 사회 일원으로 사는 사람들은 한국인보다 더 쌔빠지게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남의 일에 참견할지도 모르고, 또 교육열도 지나칠지 모른다. 그래도 한번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1년 동안은 마음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이번엔 순전히 내 마음대로 내린 결정이다. 숨 막히는 레이스에서 한발짝 떨어져보기로. 한국이 정말 숨 막히는 나라인지, 아니면 내가 개복치라 못 견딘 건지 확인해보기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최근 인스타그램, 브런치, 유튜브를 보면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다. 나처럼 회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무래도 보통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 나이가 만 30살이니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회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거겠지. 회사를 3년쯤 다니다 보면 그 나이가 되니까. 한국에서도 경험해볼 만큼 경험해봤으니, 일단 밖에서도 살아보고 결정하겠다 이런 마음일까.

완전 망해 돌아올지, 어쩌면 새로운 기회를 잡아 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무언가 도전하고, 새로운 걸 시작할 때 삶에 적자가 난 적은 없었다는 걸 기억하면 한박자 쉬는 1년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아무리 못살아도 내 한 몸뚱이 먹고살 만큼은 벌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래서 닫힌 결말로 가던 삶을 살짝 접고 열린 결말로 뛰어들어보기로 했다.

권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이런, 홀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