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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09 19:10 수정 : 2018.11.09 19:16

[토요판] 이런, 홀로!?
나의 길티 플레저

내 길티 플레저는 비엘 읽기
비엘은 ‘남자와 남자의 사랑’ 다룬
만화, 소설, 게임 등 장르

일단 입문하면 깊고 넓은 세계
현실성 전혀 없는 ‘판타지’지만
내 욕망과 즐거움 충족해줘

비엘(BL)은 보이스 러브(Boys Love)의 약자로, 여성향 만화, 소설, 게임 등의 장르 중 하나다. 비엘 소설 읽기는 여성인 나의 욕망을 안전하게 충족시키며 나를 즐겁게 해준다. 게티이미지뱅크
미용실에 갔다가 오랜만에 본 패션잡지에 이런 글이 있었다. ‘나의 길티 플레저를 공개합니다.’ ‘길티 플레저’가 무엇인가. 다소의 죄의식을 동반하고 이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임을 알고 있음에도 참을 수 없이 행하는, 대신 그만큼 큰 만족감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닌가. 사실 길티 플레저는 많은 잡지에서 심심할 때마다 싣는 소재이기도 하다. 궁금하지 않은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죄책감을 주고, 남에게 자랑할 수 없는 타인의 취미 생활이라는 것이.

그런데 다음 장을 넘긴 뒤 나의 기대감은 푸시시 식고 말았다. 거기 소개된 누군가의 길티 플레저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너무 바빠서 집안 청소가 어려워져 ‘가정부 앱’을 사용해 일주일에 한번 가정부 부르기,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이크 타기, 인터넷 뉴스에 달리는 악성 댓글 정독하기 등등. 역시 길티 플레저란 남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것이었던 것이다! 가정부 앱을 쓰거나 구남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들어가 몰래 염탐하는 정도가 길티 플레저라니!

매일 잠들기 전 비엘(BL, Boys Love,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일컫는 장르) 소설 3권 정도는 정독하고, 작가님들 트위터를 순회하며 외전 ‘썰’을 모으고, 드라마 시디(CD)의 주요 ‘섹스 신’의 회차를 들으며 출퇴근을 해줘야 길티 플레저지! 아마도 그 잡지에 글을 쓴 분들의 진짜 길티 플레저는 따로 있을 거라는 데에 500원 걸겠다. 그리고, 앞서 말한 비엘 소설을 파고 드라마 시디를 닳도록 들으며 평범한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에도 남남 커플의 브로맨스를 기대하는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포털도 부끄러워서 숨기는 ‘비엘’

비엘이 뭐야? 문외한인 당신이 포털에 방금 비엘을 검색했다면 안타깝게도 지식백과에서는 비엘이 브리티시 라이브러리, 영국도서관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찾는 것은 대영박물관이 아니란 말이다 하고 스크롤을 조금 아래로 내리면 그제야 수줍게 ‘비엘은 Boys Love(보이스 러브)의 약자로서, 여성향 만화, 소설, 게임 등의 장르 중 하나이며 ‘야오이’라고도 불린다’는 설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털 지식백과조차 부끄러워하며 하단에 숨겨놓는 것이 바로 비엘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길티 플레저가 아닌가.

로맨스·판타지·무협 장르가 이북(전자책) 시장에서 거대한 시장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비엘은 그중에서도 서브컬처로 분류되며 일부 팬들이 파고 또 파는 마이너한 장르다. 그런데 이 마이너 장르라는 것이 알고 보면 꽤 깊고도 넓어서 이제 막 입문한 신입에게는 공부할 것이 너무도 많은 신나는 세계다. 무엇을 공부하느냐, 이미 역사가 오래된 이 장르에 쌓인 소설이 너무도 많아 소설 제목들을 찾아 키워드를 자신의 취향에 맞게 정리해야 하며, 제목의 줄임말이나 인기 작가님들의 서사, 과거에 있었던 표절 시비나 소장본 구입 방법, 리디북스·알라딘·예스24 등 각 구입처에서 좀 더 싸게 사는 방법 등을 공부해야 한다. 사이트별로 이북 장르소설에 취하는 쿠폰과 적립금, 캐시 사용 방법과 날짜가 달라 영리하게 쿠폰을 활용해야 저렴하게 이 세계를 즐길 수 있다. 또한 각 사이트에서 유명작이나 외전 등의 업로드 일정을 공개하니 날짜별로 그 리스트도 챙겨야 한다. 하아, 바쁘다 바빠. 특히 자신의 취향(어떤 공-수 캐릭터를 좋아하는지, 어떤 키워드는 견딜 수 없는지 등등)이 확실해졌다면 그때부터는 각 사이트에 공개된 키워드와 미리보기 등을 살펴가며 인생작을 찾아야 한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할 권리가 있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 동성애를 소설이나 만화로 표현한 이 장르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이다. 당시 에이치오티(HOT) 팬들은 토니와 장우혁을 커플로, 젝키 팬들은 은지원과 강성훈을 커플로 팬픽 소설을 썼고 인기작들은 팬이 아닌 소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었다. 나는 딱히 어느 아이돌의 팬이 아니었음에도 워낙 소설을 좋아하는데다 당시에도 일본 야오이 만화를 즐겨 보던 차에 ‘오빠’ 이름으로 쓰인 충격적인 사랑들을 보고 그만 그 세계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잊고 살았다가 우연히 얼마 전부터 다시 비엘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심각하게 중독이 되고 말았다.

내가 비엘을 한동안 멀리 했던 것은 아마도 가족과 함께 살았기에 길티 플레저라 할 수 있는 그 장르의 소설과 만화를 모으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표지부터 이미 너무 명확하게 ‘야한’ 만화와 소설 소장본들을 내 책장에 모아두기가 매우 부끄러웠다. 일례로 이사를 도와주러 온 동생의 남자친구가 나의 비엘 만화 표지를 보고 깜짝 놀라 “누님, 이런 거 좋아하세요?”라고 비웃으며 물었던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독립해 혼자 살기 시작한 뒤에는 비엘 외에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았기에 굳이 그 장르에 목맬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몇달 전 우연히 다시 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나는 이 금단의 사랑이 주는 즐거움을 아는 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나의 가족은 앞으로도 나, 그리고 동거 중인 고양이뿐일 것이다. 지금 나의 상태는 일시적, 임시적인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나는 나를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며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얼마 전이다. 나는 확실한 비혼주의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되는대로 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큰 확률로 미래에도 나는 혼자 계속 살게 될 것 같다. 그럴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이 건강과 주거, 자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 대다수의 1인 가정이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내가 마흔 뒤에도 은퇴하지 않고 지금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글쎄, 내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노력은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순이 되었을 때, 모든 장기가 멀쩡히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신체가 유지될 것인가. 그것도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매일 운동을 30분 이상 하자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못 하고 안 한다. 그렇다면 집? 하아, 그건 대한민국 서울시에 거주하고 있는 1인 가구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빠를 것이다. 매달 쥐꼬리만큼 주택청약 적금을 넣긴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거고 그걸로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은 진즉 포기했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월세 주거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물론 로또를 산다든가, 로또를 산다든가, 로또를 산다든가 하는 등의 방식으로 ‘노력’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중요한 것. 앞으로 쭉 1인 가정을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여성인 나는 어떻게 나의 욕망을 안전하게 충족시키며 나를 즐겁게 해줄 것인가. 비엘은 완전히 ‘판타지’를 가정하고 세계를 확장한다. 비엘 독자들은 ‘퀴어’ 독자가 아니다. 현실 게이, 현실 한국 남자가 등장하는 작품은 별로 인기가 없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남자-남자의 러브스토리이지만 진짜 퀴어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 세계는. 이 세상에 다시없을 사랑을 하고 서로가 없으면 안 된다고 죽네 사네 하고 상대에게 12억원짜리 시계를 선물하기도 하고, 페라리나 아파트를 턱턱 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판타지이고, 독자인 나는 그것을 다 고려한 상태에서 헤헤헤 즐기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이것은 세상에 없을 사랑이고, 나는 이 세계 밖의 완전한 타인이자 독자이니까. 혼자 살지 않는 독자 중에 남편과 비엘을 같이 본다는 독자도 있고, 아이를 재워놓고 비엘을 본다는 독자들도 있다. 가족이 있는 여성들에게도 비엘은 중요한 즐거움, 욕망의 해소처다.

한때 비엘 독자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다. “나 30대인데 비엘 보는 거 부끄러운 걸까? 님들은 몇살까지 비엘 볼 것 같아?” 여기에 달린 베스트 댓글을 소개한다.

“나, 관 닫고 갈 때까지 볼 건데? 내 관에 소장본 넣어달라고 할 거야.”

늘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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