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01 09:48
수정 : 2019.09.01 09:56
[토요판] 이런 홀로
효도는 셀프
아버지 환갑 생신 선물로
4박5일 대만 여행 가이드
하루도 안 돼 한국 음식 찾고
사진 1천장 넘게 찍으시는
부모님 보며 평정심 잃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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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에 여행비 일체는 물론,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수당까지 얹어줄 테니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는 소심한 협박을 동생에게 선사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동생은 괜찮다며 극구 사양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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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더해갈수록 부모님의 생일은 의미가 깊어진다. 더욱 잘해드려야겠다는 욕심과 함께 부담 또한 더해진다. 게다가 그게 아버지의 환갑이라면 느낌이 다르다. 몇년 전부터 환갑을 기대하라며 가족들에게 큰소리친 것도 있지만, 그 핑계로 전혀 기대감 없는 영화 예고편처럼 앞선 생일들을(괜히 어머니까지 묶어) 대충 챙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내 지갑 사정 탓이긴 했으나 정말 그럴듯하게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과거에는 60살까지 생존하는 게 쉽지도 않았고 당연히 환갑은 가족의 큰 경사였다. 일가족이 모두 모여 잔치를 하고 부모의 지나온 삶을 위로하며 건강한 여생을 응원할 가치가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의 환갑은 많이 다르다. 그들은 이 시점에서 죽음을 떠올리고 남은 삶을 정리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치열하게 현재 진행 중이다. 불편한 친척들과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색한 자리를 마련하는 대신, 환갑을 맞이한 아버지의 삶에 느낌표 하나를 더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환갑을 맞이해 외국여행을 가기로 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다. 여행지로 선택한 대만은 혼자 자유여행을 다녀온 곳이라 부담도 없었다.
똑같은 질문 각자 하는 부모님
하지만 시작부터 우리의 4박5일은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대만의 공항에 도착한 다음 도심으로 나가는 버스표를 인터넷으로 예매해뒀는데, 이 표를 받기 위해 현지 직원에게 모바일 티켓을 내밀었지만 직원은 세상 처음 보는 거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노트북의 뭔가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시도하는 듯했지만 연신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곤란함을 표시했다. 그사이 내 뒤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일단 물러서 다시 확인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람들이 빠진 틈을 타 다시 똑같은 모바일 티켓을 내미는 일뿐이었다. 역시나 잘되지 않는 듯했다. 직원은 확인이 되지 않는 모바일 티켓을 포기한 듯 그냥 종이 티켓 3장을 내게 건넸다. 진심으로 억울한 내 표정과 짜증 섞인 말투 때문이었을까. 어쨌건 대만에서의 첫 버스를 타기 위한 표를 얻긴 했지만 부모님의 눈빛에서 짧은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 녀석을 믿고 4박5일을 온전히 내던져도 될까?’
여행 기간 내내 부모님은 계속해서 다음 동선을 물었다. 그런데 서로의 질문에는 관심이 없는지 나는 계속해서 똑같은 대답을 두번씩 반복해야 했다. 아버지가 먼저 “다음에 어디 간다고 그랬지? 거기에는 뭐 타고 갈 거야?”라고 묻고 난 뒤, 조금 있다가 다시 어머니가 해맑게 웃으며 “우리 이제 어디 가?”라고 묻는 식이었다. 동남아의 한여름 무더위는 호텔방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부모님의 질문 공격이 이동할 때마다 셀 수 없이 누적되자 조금씩 평정심을 잃어가며 멘탈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나에게 의지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어느 순간부터 부담을 느낀 탓도 있었다. 평소에는 없던 사명감을 발휘해 ‘완벽한 준비로 가족여행을 망치지 않고 최대한 무사히 끝내고 싶다’는 내 욕심은 덤이었다.
충분히 예상했지만 음식도 문제였다. 대만 문화를 느껴보자는 의미에서 야시장을 구경하고 내가 맛있게 먹었던 맛집들을 소개했지만 아버지는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시점에 내게 한식당 검색을 주문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식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빨리. 여기에 한식당이 어디 있겠냐며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불같이 화를 내면서 몰래 검색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주변 곳곳에 한식당이 많았다. 아무 내색 없이 어머니도 자신을 한식당으로 데려가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건 아버지의 환갑 여행이야!”라고 되뇌며 식당으로 향했다. 순두부찌개와 돌솥비빔밥 같은 것들을 파는 곳이었다. 나는 먹는 내내 못마땅함을 풀풀 풍기며 부모님을 있는 힘껏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버지의 선택은 매우 훌륭했다. 외국에서 먹는 한식은 같은 메뉴지만 우리가 평소 먹던 그 맛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예상 밖의 독특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여행 내내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부모님의 포토타임이었다. 워낙 많은 관광지를 다니다 보니 그만큼 볼만한 풍경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곳곳에서 최대한 많은 사진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둘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같이 찍는 대신 각자가 원하는 게 확실했다. 저쪽에서 나를 부르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채 누르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전혀 다른 곳에서 아버지가 포즈를 취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메라가 그를 향할 때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미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 쪼그리고 앉아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나를 부른다. 동시에 아버지는 다음 장소를 물색하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 뒤를 돌아보는 포즈를 연습하고 있다. 4박5일 내내, 관광지는 물론 버스터미널이나 호텔,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네 벤치 앞에서도 부모님은 계속해서 사진을 요구했다. 이럴 거면 여행 코스와 맛집을 검색하는 대신, 좋은 카메라와 촬영 기법을 공부할 걸 그랬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1천장이 훌쩍 넘는 사진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대리 효도’는 없을 것
여행이 무사히 끝났다. 생각의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여정이었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듯, 지나고 보니 오롯이 추억만 남았다. 무엇보다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확실히 부모님과의 외국여행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통닭을 팔며 잠복근무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말이다. 부모님과의 대만 여행이 끝난 뒤, 바쁜 생업으로 함께 가지 못한 동생과 통화했다. 나는 다음에 여행비 일체는 물론,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수당까지 얹어줄 테니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는 소심한 협박을 동생에게 선사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동생은 괜찮다며 극구 사양했다.
2년 뒤엔 또 어머니의 환갑이 돌아온다. 더욱 그럴듯한 여행지를 찾아 또 다른 외국여행을 계획해보려 한다. 연습경기를 한번 했으니 본경기는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묘한 의욕이 생김과 동시에, 이걸 또 어떻게 하나 싶은 양가적 감정이 마구 뒤엉킨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르지만 이미 다 알고 난 뒤 그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어찌 군대에 입대해 무사히 전역했지만 모든 걸 알고 난 지금,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비슷할까.
요즘 ‘대리 효도’라는 말이 유행이다. 배우자를 통해 효도한다는 말로, 남성들이 결혼한 뒤 아내에게 자신의 부모님에게 매일 안부 전화를 하게 하고 주말마다 찾아뵙게 하고 명절에 시가에서 부침개를 부치도록 하는 그런 일련의 일을 말한다. ‘대리 효도’의 끝판왕은 단연 시부모님 모시고 외국여행을 가는 것이다. ‘가족이니까’ ‘함께 가면 즐거우니까’라는 미명으로 시부모님과 가는 외국여행은 그만큼 고되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일이라고 한다. 2년 뒤 돌아오는 어머니 환갑에 이 ‘극한 도전’을 미래의 배우자에게 시키지는 않겠다. 이번 여행으로 제대로 배운 것은 바로 ‘효도는 셀프’라는 것이니까.
날아라 통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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