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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1 09:17 수정 : 2019.12.21 10:07

직장이 어디이고, 무슨 일을 하고, 재산이 얼마이고 부동산이 어디가 오르고, 누가 얼마를 벌었다는 소재의 이야기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느슨한 공동체. 우리의 모임은 이웃의 끈끈한 정과 우리네 공동체를 강조하는 공익광고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린 어쩌다 헤쳐 모여서 즐겁게 논다. 게티이미지뱅크

[토요판] 이런 홀로
우리들의 짜릿한 연말 모임

매주 생존 안부 전하는 단톡방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요리 몇 개 놓고 연말 집들이

고향, 직장, 재산 따위 안 물어
홀로들의 차갑고 느슨한 모임
혼자지만 헤쳐 모여 즐겁게 놀아

직장이 어디이고, 무슨 일을 하고, 재산이 얼마이고 부동산이 어디가 오르고, 누가 얼마를 벌었다는 소재의 이야기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느슨한 공동체. 우리의 모임은 이웃의 끈끈한 정과 우리네 공동체를 강조하는 공익광고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린 어쩌다 헤쳐 모여서 즐겁게 논다. 게티이미지뱅크

연말이면 아무래도 평소보다는 약속이 많아진다. 립서비스로 ‘언제 밥 한번 먹자’ 하던 사람들과 ‘올해 가기 전 한번 보자’ 했던 것들이 실제 만남으로 성사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 ○○회 졸업생 모임, 길따라 등산회 모임 등 5명 이상 모이는 단체 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런 모임이 더욱 많을 것이다. 떠올려보면 우리 부모님 역시 연말에는 항상 이런 모임이 주마다 있었다. 초등학생 때까진 그런 ‘계모임’에 따라다녔는데, 밤늦게 돌아오는 길엔 차에서 항상 그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하던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차 안에서 “아니, 용식이는 그래서 이혼을 한다는 거야?” “오늘 부인 안 나왔잖아. 저번에 또 화투 치다 걸렸는데 부인이 경찰에 신고해서 죽네 사네 했다더라고.” “그래도 딸이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을 자랑을.” 30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 영원할 것처럼 마시고 부어대던 아저씨들과 그의 부인들의 카더라 통신을 뒷자리에서 들으며 기분 나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는 계모임을 하거나 고교 동창회 따위의 모임은 전혀 하지 않는데다, 최근 있었던 송년회 모임은 대부분 누군가의 집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나의 부모 세대와 가장 큰 차이다. 부부 다섯쌍 이상, 아이들까지 가세하는 모임들은 워낙 규모가 커져서 고깃집이나 횟집에서 상을 다섯개는 붙여놓고 거하게 치러야 하지만 내 친구들과 나의 모임은 대부분 서너명이 오붓하게 모여 누군가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논다. 참석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하나씩 가져가서 먹는 소소한 파티 정도다.

‘고독한 ㅅㅈ방’의 비밀

지난주에도 그런 모임이 하나 있었다. 재밌게도 나는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최모모라는 사람과 서로 다른 곳에서 만난 친구들인데 그가 한 채팅방에 초대해 모이게 됐다. 이 채팅방의 이름은 ‘고독한 ㅅㅈ방’이다. 이 방에 들어와 있는 나를 포함한 4명은 모두 1인가구다. 우리는 수요일 오전 중에 서로의 생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채팅방에 간단하게 ‘ㅅㅈ’이라고 ‘생존’의 첫 자음을 딴 말을 쓴다. 아주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이 방에는 ‘생존’ 두 글자뿐이다. 아직 20대 후반 30대 중반인 젊은이들의 단체 채팅방에서 왜 생존 타령을 하느냐 하면 우리 모두 1인가구이기 때문이다. 고독사할 경우 서로의 주검을 수습해주자는, 최모모씨의 서글픈 제안에서 시작된 채팅방이다.

나는 최모모씨와 친구지만 이 채팅방의 다른 사람들과는 이름만 아는 사이다. 이름이라는 것도 채팅방에 등록된 별명이다. 이들 중 한명이 집들이를 하겠다며 주소를 채팅방에 공유했고, 나는 아닌 밤중에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낯선 동네의 빌라촌을 헤매었던 것이 지난주 금요일의 일이다. 주소만 받아들고 채팅방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다들 조금씩 늦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집에서 나 혼자 그 집 구경을 먼저 하게 되었다. 생존 신고가 늦으면 누군가 집에 쓰러져 있는 것이니 집 주소를 공유해두자며 채팅방에 서로의 주소도 등록되어 있지만 얼굴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방 두개에 거실과 부엌이 있는 빌라의 301호에 사는 ‘생존 친구’는 손님을 맞이해 바삐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의 첫인사는 이랬다. “아, 안녕하세요.” “네, 과메기 드시나요?” “네, 없어서 못 먹어요. 근데 웬 과메기. 혹시 고향에서 올려 보내주신 건가요?”(그렇다, 우리는 서로의 연고지도 모르는 사이다.) “아니요, 쿠○ 배송에서 싸길래 샀는데 엄청 많아요. 맥주 드실래요, 물 드릴까요?” “맥주요. 집들이까지 하시고,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긁적)

채팅방에는 없었던, 친구의 친구까지 2명이나 더 온다는 소식을 그 자리에서 듣고 느닷없는 집들이에 6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과메기와 마라샹궈와,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누가 들으면 참으로 이상한 연말 모임일 테다. 사람이 늘어나자 음식이 모자라 ‘아빠존스’의 ‘존스 페이버릿’ 피자를 주문하고, 좀 늦게 도착한다는 사람에게 “올 때 맥주를 더 사오시겠어요? 아이스크림도요”라고 추가 주문까지 하고 우리는 맥락 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2명의 이름은 사실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름도, 직업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 6명이 모여서 몇시간이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이 모임은 배경음악 선정도 그냥 하지 않았다. 일본 음악을 즐겨 듣는 집주인의 선곡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이 자기 취향의 곡을 틀자 또 다른 사람들이 이 노래 말고 다른 걸 듣자고 제안하고 결국은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한명씩 돌아가며 말하고 나머지 사람 중 2명 이상이 엄지를 아래로 내리면 못 듣는, 게임과 같은 노래 선곡이 진행됐다. 티브이 모니터에 연결된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음악을 연이어 들었는데 그 노래를 너무 듣고 싶으면 ‘이 노래가 왜 좋은지’ 추천사를 말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 중 한명은 그 집에 있는 전자피아노를 30분 동안 뚱땅거리며 연주를 하기도 했고, 뒤늦게 온 친구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길래 이 집인 줄 알았다”며 “피아노 잘 치시네요”라고 맘에도 없는 칭찬을 하고, 나는 또 그것을 말리며 “그러지 마세요. 그럼 더 친단 말이에요”라고 첫인사를 했던 기억도 난다. 체력 저하가 심각해 새벽 1시쯤 나는 먼저 그 집을 나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새벽 5시까지 게임과 퀴즈를 했다는 소식을 이튿날 그 채팅방에서 들었다.

이름도 모르면서 주소 공유하는 사이

이 이상한 송년 모임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내 주변에 갈수록 이런 관계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나는 이게 싫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학교를 다닌 적도, 회사를 다닌 적도 없다. 사회에 나와 만난 사이라고 하기에도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는 그냥 채팅방에서 ‘생존 신고’를 하는 사이다. 서로 이름도 잘 모르면서 주소는 공유하고 있다. 지금은 다들 건강하니 수요일에 ‘ㅅㅈ’이라는 글자가 뜨지 않더라도 당장 112에 신고하진 않는다. 대개는 그냥 ‘바빠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아주 먼 훗날에는 정말 이런 고독한 생존방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죽은 지 한달 만에 이웃의 악취 신고로 발견된 주검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종종 서로의 안부를 단체 채팅방에 물을 것이다. 그리고 1년에 한두번 집들이라는 구실을 붙여 이렇게 만나서 그냥 쓸데없는 수다나 늘어놓으며 아이돌 음악을 돌려 들을 것이다.

직장이 어디이고, 무슨 일을 하고, 재산이 얼마이고 부동산이 어디가 오르고 누가 얼마를 벌었다는 소재의 이야기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느슨한 공동체. 누구든 먼저 일어서도 ‘더 마셔라, 그런 게 어디 있냐’ 붙잡지 않는, 별로 친하지 않은 그런 사이. 이웃의 끈끈한 정과 우리네 공동체를 강조하는 공익광고에는 나오지 않을 심플하며 차가운 모임. 우리 각자는 혼자지만 어쩌다 헤쳐 모여서는 즐겁게 논다.

아, 그리고 오늘 아침 고독한 생존방에 새로운 뉴스가 떴다. “○○님이 이런 거 말하기 부담스러울 것 같아 제가 정리해요. 피자 ○만원+와인 ◇만원을 ‘엔빵’한 금액입니다. 카카오뱅크 000-00000-00000으로 부쳐주세요.”

늘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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