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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28 09:45 수정 : 2018.10.28 12:28

[토요판] 인터뷰
충정공 민영환 4대손 민명기 작가
평범하게 살다 일흔 넘어 작가로
증조부·모친 얘기 잇따라 소설화
“어릴 때 할머니께 들은 집안 얘기
역사 모르는 후손에게 알리고파”

구한말 척족 여흥 민씨네 흥망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대로 기술해
“우리 집안 안 망하고 있었으면
지금도 웃기는 행태 계속할지도”

“남부러울 것 없었던 45살의 남자가 왜 죽음을 결심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을 그린 소설 <죽지 않는 혼>을 쓴 민명기 작가가 지난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 앞에서 <한겨레>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민 작가는 충정공의 증손녀(직계 4대손)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5천년 우리 역사에서 충정공 민영환의 죽음만큼 장엄하고 강렬한 예는 많지 않다. 나라의 멸망에 사죄하면서 지도자가 목숨을 끊은 것은 굴복이 아니라 강한 저항이었다. 민영환 얘기를 증손녀가 소설로 들고왔다. 그는 앞서 어머니의 삶도 소설로 그렸다. 민명기 작가를 지난 23일 오후 광화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분의 자결 후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국이 되었고, 왕실의 몰락과 함께 우리 집안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가정적으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던 마흔다섯의 정치인이 왜 자신의 목에 칼을 꽂았을까 하는 의문이 늘 나를 떠나지 않았다.” <죽지 않는 혼>(중앙books)을 쓴 작가의 후기다.

‘그분’은 구한말 우국지사인 충정공 민영환이다. 민영환은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을사늑약)한 데 항의해 그해 11월30일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라와 국민에 대한 사랑, 군주에 대한 충성, 일본에 대한 저항을 담은 그의 죽음은 강렬했다. 애국과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삶을 최근 소설화한 작가 민명기(73·이하 호칭 생략)는 충정공의 직계 4대손(증손녀)이다. 민명기는 앞서 지난해에는 충정공의 손자 며느리인 자신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집안 얘기를 소설(<하린>)로 썼다. <하린>이 충정공의 자녀들과 손자대의 얘기였던 데 비해 <죽지 않는 혼>은 충정공과 부모, 형제들 얘기가 중심이다. 100여년에 걸친 충정공 가문의 역사가 두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젊을땐 신춘문예 입상도

-1년 만에 또다시 장편소설을 썼다. 힘들지는 않았나.

“많이 힘들었다. 역사 사건이어서 정확한 연도와 날짜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어느 사건이 어느 사건을 불러왔는지 등 관계를 알기 위해서 자료를 뒤져 공부를 해야 했다. 고려대학교에서 펴낸 <사이불사(死而不死)>와 국사편찬위원회가 낸 <민충정공 유고>, 계명대 교수였던 마이클 핀치의 <민영환>(Min Younghwan, A Political Biography)을 많이 참고했다. 특히 영국인인 핀치 교수 책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분께 내 책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연락처를 못 찾고 있다.”

대학(이화여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민명기는 일흔이 넘어서야 작가가 됐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던 젊은 시절 <한국일보> 엘에이(LA) 지사에서 주최한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입상한 적은 있지만, 그동안 바쁜 일상 때문에 글쓰기는 엄두를 못냈다. 저명한 정치학자 최장집(75·고려대 명예교수)이 남편이다. 대학 때 친한 친구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변호사협회(USA Bar Associasion)’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남편의 유학(시카고대학)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 Accenture’ 등에서 일했다.

-소설은 어떻게 해서 쓰게 됐나?

“평소 좋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한테도 글 소재가 있는데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남아공의 제임스 구찌(James M. Coetzee)와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Alice Ann Munro)다. 구찌는 단문으로 글이 차갑고 섬세한 표현이 없는데도 인간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인간 심리를 날카롭게 그린다. 먼로도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멋진 이야기로 만든다. 그런 소설을 보면서 퇴직 뒤 시간이 나면 나도 글을 쓰겠다고 늘 생각했다.”

충정공 민영환 증손녀인 민영기 작가가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 근처에 있는 남편 최장집 교수의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왼쪽 회색빛 방문에 인터뷰하는 기자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잡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소설 주인공이 왜 하필 충정공과 어머니였나?

“특별한 생을 사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충정공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던 구한말 정치적 책임을 실천한 드문 분들 중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분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모른다. 우리 집 아이들도 그런 역사를 잘 모른다.”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 파기와 을사5적(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인다.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는 오히려 고종의 명에 의해 재판소격인 평리원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상황을 돌이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민영환은 전동 자신의 집(지금은 견지동 조계사 경내에 위치)서 300미터쯤 떨어진 청지기 이완식의 집(공평동 공평빌딩 앞)에서 11월30일 새벽에 자결한다.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그의 옷에서는 국민과 각국 사절, 고종에게 보내는 유서가 나왔다. “(전략)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여러분을 구천지하에서 기필코 도울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번 분발하고 힘써서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학문에 힘쓰며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도 어두운 지하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아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결연히 알리노라.”

그의 죽음은 민족의식을 깨운 기폭제로 작용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위로는 진신(높은 벼슬아치)으로부터 밑으로는 방곡의 조예(관아의 하인), 부유(부녀자와 어린이), 걸인, 각 사찰의 승도들도 거리가 빽빽하게 모여 곡을 하면서 전송하였고, 그 곡성은 산야를 뒤덮었다”고 장례식 모습을 적었다. 그가 숨진 지 8개월 뒤 피묻은 옷을 걸어둔 전동 집의 방바닥에서 대나무 4줄기가 자라고 있는 것이 가족들에 의해 발견됐다. 혈죽(血竹) 또는 절죽(節竹)으로 불린 이 대나무는 곧 일본 경찰에 의해 뽑혔으며, 가족들에 의해 보관돼오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됐다.

충정공 민영환의 피묻은 옷을 걸어둔 방에서 자랐다는 대나무(혈죽)의 모습. 숨진 이듬해인 1906년 7월에 찍은 대나무 사진. 사진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민영환이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서. 자신의 명함 앞뒤면에 적은 이 유서는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
평생 수절한 어머니께 로맨스를 선물

-책을 쓰면서 충정공의 어떤 점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나?

“그의 고뇌와 책임감이었다. 충정공은 당시 최고 위치에 있었던 정치인이었다.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이 얼마나 강했으면 죽음을 결심했겠나. 따지고 보면 자기 잘못으로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2천만 동포들에게 사죄하면서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때 제일 큰 아이가 겨우 일곱살이었고, 그 아래 연년생으로 4명이 더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가 자결한 장소와 살던 집터를 여러 차례 가봤다. 그때마다 그가 죽음을 결심한 날, 결행하는 순간에 가졌을 고결한 생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또, 가족들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까봐 거사 장소를 청지기 집으로 정한 것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하다.”

-<죽지 않는 혼>에는 역사 인물들이 다 실명으로 나온다. 내용도 다 사실인가.

“충정공의 첩인 ‘개성댁’에 대한 얘기를 빼고는 모두 사실에 근거했다. 첩은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충정공 가문(여흥 민씨)은 조선 후기에 왕비를 여럿 배출한 최고 권력가 집안이었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와 순종 비 순명효황후가 대표적이며, 앞서 숙종 비 인현왕후도 여흥 민씨 출신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은 민영환의 고모로, 고종과 민영환은 사촌간이다. 명성황후와 민영환은 13촌간의 다소 먼 친척이었지만, 민영환의 세째 큰 아버지(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로 입양감으로써 두 민씨 집안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됐다. 정국 변화에 따라 다소의 부침은 있었지만, 민영환은 불과 스무살에 고위직인 당상관이 됐을 정도로 고종이 신뢰하는 최측근이었다. 1896년과 1897년에는 황제의 특사(특명전권공사)로 각각 러시와와 영국에 파견되기도 했다.

1896년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차 러시아를 처음 방문한 민영환 특명전권공사(앞줄 중앙 갓쓴 이) 등 러시아 사절단이 러시아 관료들과 만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장소인 서울 공평동 공평빌딩 앞에 설치된 기억비. 혈죽과 그가 입고 있던 대한제국의 정복 및 칼이 형상화돼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하지만, 민영환의 자결 이후 경기도 부평 일대에 있었던 대농장(목양사)이 친일파 거두였던 송병준의 손에 넘어가는 등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큰아들 범식은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일제의 감시와 사찰 때문에 술 등 유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34년 36살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범식의 아들(병철) 즉, 민영환의 손자 역시 해방 전에는 영동군청 직원, 해방 후에는 미국 건설회사 통역일 등을 하다가 1947년 가을 차량 사고로 숨졌다. 병철은 서른한살이었으며, 외동딸 명기는 갓 두 돌이었다.

-<하린>을 보면 어머니가 시집온 뒤 가난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이었나?

“그렇다. 할아버지(범식)와 아버지(병철)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신 데다가 오랫동안 집안에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 보니 할머니와 어머니가 바느질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아이들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평소 일을 많이 해본 분들이 아니어서 생산력이 낮았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계동에 있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옆집이었는데 집터는 매우 넓었다. 하지만, 아버지 형제들이 방 하나에 가족을 꾸리고 살았고, 각 건물에는 곁방을 만들어 세를 놓았다. 6·25 때 대전으로 피난갔을 때는 <하린>에 나오듯이 어머니가 버선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 하린은 그의 어머니(김성린)를 형상화한 인물이다. 광산 김씨 양반 집안의 딸인 김성린은 고종의 두번째 왕비로 간택됐던 정화당(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 명성왕후가 살해(을미사변)된 뒤 당시 친일파 신하들이 주도해 새 왕비로 뽑힌 인물이 바로 정화당이다. 하지만, 궁녀 출신의 엄비를 총애하는 데다가 명성왕후의 죽음으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던 고종은 새 왕비를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정화당은 20여년이 지나서야 후궁 자격으로 간신히 궁궐에 들어가지만, 고종 생존에는 한 번도 남편을 만나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소설에는 하린이 피난 생활에서 한기범이라는 화가에게 애뜻한 정을 품는 것으로 나오는데.

“우리 가족 중에도 어머니와 화가의 사랑이 사실이냐고 묻는데 그건 전적으로 픽션이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뒤 평생을 홀로 외롭게 사신 어머니에게 소설에서마나 짜릿한 로맨스를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웃음) 제 친구 한명이 이왕이면 어머니와 화가의 하룻밤을 허락하지 그랬냐고 농담을 하길래 ‘그러면 다른 연애소설과 똑 같아진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정말 고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통을 존중하셨다. 사위한테 편지를 쓸 때도 ‘서랑 보오소(보소)’라고 적었으며, 자신의 친정 부모님을 칭할 때는 늘 ‘밭어버이, 안어버이’라고 불렀다.”

민영환의 4대손인 민명기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하린>)와 증조부(<죽지 않는 혼>)를 소재로 쓴 두 권의 소설. 김종철 선임기자

소설로 본 명문가 흥망사

민명기는 두 소설에서 민씨 일가를 두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냉정하고 성찰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탐관오리로 불린 충정공 아버지(겸호)가 임오군란(1882년) 때 성난 군인들에게 맞아죽었던 일, 충정공 동생(영찬)의 친일 행위, 작가의 할아버지(범식)의 난봉꾼 같은 타락한 생활, 그의 아버지(병철)의 술주정 등 부끄러운 부분도 적었다. 두 소설을 구한 말 명문가의 흥망을 담은 사회사이자 생활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충정공이 의로운 죽음을 택하긴 했지만, 민씨 집안은 척족세력의 사회 기득권층이었다. 일제시대와 6·25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재산을 빼앗기거나 잃은 데 대한 아쉬운 생각이 가문에서는 없나.

“저는 없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아주 잘됐다고 생각한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자랄 때만 해도 얼마나 부유했던지 충정공 부인은 아들 2명을 프랑스와 독일로 유학 보내고, 며느리들을 인력거 태워서 기독교가 세운 학교인 태화여자관에 보냈다. 그렇게 부유했던 사람들이 재산을 다 잃었는데 할아버지들이 못나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잘 망했다고 본다. 친가 가족 중에서도 그런 말을 한다. ‘우리 집안은 잘 망했다. 안 망했으면 군상들이 아직도 웃기는 행태를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는 다음 작품도 구상하고 있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어떻게 변질돼 갔는지, 을사조약을 둘러싼 대신의 갈등과 배신 등을 줄거리로 삼을 계획이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겸손해했지만, 기자는 노작가가 소설로 그려낼 엄정한 역사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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