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정치기록 기증한 이종찬 전 국정원장
공직 때 공·사적 기록 1만건
국회도서관에 기증해 공개
학원안정법 시안, 6·29선언문 등
희귀 문서들 다수 포함돼
“치부가 될 내용 있더라도
기록은 사회적으로 공유돼야”
“후세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아야
교훈을 얻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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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공공재다.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이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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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1980년 신군부 세력에 발탁돼 정치를 시작한 뒤 2000년까지 활동했다. 민정당 등 보수정당 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공직에 있는 동안 공식 문서 외에 일기와 메모 등 사적 기록도 만들어 보관했다. 한국 정치사와 현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이다. 국회도서관에 그 기록을 기증한 이종찬 전 의원을 지난 19일 오후 서울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만났다.
“늦게까지 책보고 잠자다가 12시에 궁정동에서 점심을 했다. 기획회의에서 논의했는데 1)명성그룹 사건: 국회를 검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미루자고 합의했다. 2)국민당 당권: 간섭하지 말고 김종철 총재에게 일임하자고 결론내렸다. 3)김영삼과 접촉: 권(익현) (사무)총장이 상도동에 가거나 먼저 전화하는 것은 안 하기로 했다(후략).”(1983년 8월18일)
“아침 일찍 청와대에 갔다. 상(임)위 운영대책에 관하여 보고차 간 것이다. 먼저 권익현 (사무)총장이 귀국보고를 했다. 미국에서 민주당 인사를 많이 만났다. 미국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은 경제 발전은 이룩됐지만 정치 발전은 이룩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달성할 것이냐가 주된 과제라는 문의가 많았다고 한다. Newsweek(뉴스위크) Backpage(백페이지)에 권 (사무)총장 인터뷰 기사가 났는데 평화적 정권교체가 강조되어 있는데 상당히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각하는 인터뷰 잘했다고 오히려 격려하였다(후략).”(1983년 8월19일)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3년 8월에 작성된 이종찬(82·호칭 생략) 일기의 한 대목이다. 당시 대형 부도사태를 빚은 명성그룹이나 그해 5월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을 벌였던 야당 지도자 김영삼에 대한 대책이야 흔한 전략이지만,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국민당(한국국민당) 문제이다. 국민당은 옛 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돼 만든 당으로 의원 25명의 원내 제3당이었다. 그해 초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총재 김종철이 기존 당직자를 그대로 유임시켰다가 당내 반발이 일어나자 8월 말에 개편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김종철은 8월이 돼서도 당직 개편을 할 건지 말 건지조차 분명히 밝히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즈음 여당이 “국민당 당권을 간섭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실제로 얼마 뒤 국민당은 당직 개편을 했다. 이종찬의 이날 일기는 민정당의 ‘2중대’(민한당), ‘3중대’(국민당)으로 불리던 당시 야당들을 여당이 어떻게 컨트롤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기도 사후에 공개할 것”
이튿날인 19일 목요일 일기도 생생하다. 당의 실세인 사무총장이 미국의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각하’가 늘 말하던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것’이라고 답해놓고도 이게 혹시 각하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권력 핵심들도 ‘각하 전두환’이 진짜 헌법 규정대로 7년만 하고 물러날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종찬의 일기는 아직 기증되지 않은 상태로, 기자가 개인적으로 취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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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8월의 ‘이종찬 일기’의 한 페이지. ‘김영삼과 먼저 접촉하지 말자’는 것과 ‘국민당 당권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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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은 이처럼 한국 정치사를 증언하는 일기를 매일 써왔다. 일기 뿐 아니다. 늘 지니고 다니던 작은 수첩에는 그가 만났거나 전화를 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과의 대화 내용, 작은 아이디어 등을 깨알처럼 적었다. 또, 당직이나 정무장관, 국정원장 등 공직에 있을 때 만들거나 보고 받았던 주요 문서들도 보관했다. 그는 이런 기록의 상당 부분을 국회도서관에 지난 2월부터 순차적으로 기증하고 있다. 현재까지 정리한 것만 해도 7200여건에 이르며, 다 정리하면 최종적으로 1만건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도서관은 지난달 이 가운데 일부를 전시했다. 전시된 것은 국회기록보존소 홈페이지(http://archives.nanet.go.kr/main.do)에 올라있다. 나머지 기록도 정리가 끝나는 대로 인터넷에 공개할 계획이다.
-기록을 기증하게 된 계기가 있나?
“모든 문서나 자료가 중요한 역사 기록이 된다는 생각에서 버리지 않고 평소 차곡차곡 모아뒀다. 내가 죽은 뒤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너무 아깝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그러던 차에 현경대 전 의원을 만났는데 그가 개헌(1987년) 문건을 국회도서관에 보냈다고 하더라. 생각해 보니 연구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자료에 접근하는 데는 국회도서관(관장 허용범)이 나을 것 같아서 국회에 기증하게 됐다.”
특히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 관련 기록은 한국 현대사와 정치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다. 정강정책 논의와 회의록 등 공식 문서 뿐 아니라 창당 주역이었던 이종찬이 각계 영입대상 인물들을 만나고 다닌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집단이 다른 정치세력의 손발을 묶어놓은 채 집권당을 급조하는 과정이었지만, 정당 창당의 속 모습까지 알 수 있다.
-아직 댁에 가지고 있는 자료가 많이 있다고 들었다.
“개인의 명예에 관련된 것 등 민감한 기록은 내가 갖고 있다. 그런 게 대략 3천 건 정도 되는데 이것도 마저 다 넘기려고 한다. 다만, 내가 죽고 10년쯤 지나서 공개하라는 단서를 붙일까 한다.”
민감한 기록이 포함된 대표적인 자료가 일기다. 이종찬은 일기 역시 공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틈날 때마다 노트에 적힌 내용을 컴퓨터에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누구나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료가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안 내놓는다.
“공적인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일기 등 사적인 기록도 작성은 내가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 공공재다.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일기에는 개인적인 부분도 많지 않나?
“당연히 공적인 것과 개인적인 내용이 섞여 있다. 치부가 될 만한 것도 있다.”
-감추고 싶은 것은 없나. 후세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보면 어떡하나는 생각은 안 들었나?
“하나의 인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뿐이다. 인간은 어떤 점에서는 다 비슷하다. 누구나 욕심도 있고,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픈 생각도 있는 것이다. 그런 자연스런 것을 다 뺀다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기를 쓰는 것밖에 더 되나. 그건 아니다. 그냥 정직하게 다 써놓고 사후에 평가를 받으면 된다.”
-속으로 뜨끔해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그래서 사후 10년 뒤에 공개하라고 단서를 다는 거다. 후세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교훈을 얻을 것 아닌가.”
현실 정치 위기에 대한 고언
“보수는 정신 못차리고 타락
여당도 대통령에 할 얘기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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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면서 파안대소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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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중정에 내려보낸 비밀문서
이종찬이 공개한 것 중에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1985년 ‘학원안정법 시안’이 대표적이다.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을 수용시설에 감금해 “선도교육”을 실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안기부장 장세동과 정무수석 허문도가 밀어부치다가 이종찬 등 여당 내 온건파의 반대와 여론의 반발에 부딪쳐 결국 폐기됐다. 그동안 언론 보도내용만 있었지 법안의 실물은 처음 공개됐다. 1987년 6월항쟁에 집권세력이 항복한 ‘6·29 선언문’도 당시의 진본이다. 민정당 대선후보였던 노태우가 직접 읽은 원본은 아니지만, 당시 당 대표 특별보좌역이었던 이병기가 펜으로 직접 쓴 것을 복사한 30부 가운데 하나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 독재체재를 구축하기 훨씬 전부터 남북대화가 본격화되면 국민을 옥죄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민족발전연구원의 주관중이 1971년 10월 대통령한테 올린 ‘남북대화 개시 후의 전개될 상황전망 분석’이라는 보고서다. 보고서는 “남북대화가 개시되면” “민심이 흥분”할 것이기에 “민심을 냉각시키는 정책구상”을 해야 하고, 법적으로는 “행동규제를 강화하는 입법”, “즉, 통일기반 조성법(내용 성격은 치안유지법)의 입법 준비가 필요”하다고 썼다. 한마디로 통일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을 막아야 하며, 국민들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보고서를 읽은 뒤 친필 서명과 함께 “CIA(중앙정보부)에서 참조”라고 써서 중앙정보부장(이후락)한테 내려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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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대화가 본격화되면 민심을 냉각시킬 치안유지법 등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이 보고서를 본 뒤 중앙정보부가 참고하라며 친필 서명을 해서 내려보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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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이 한창이던 때 이종찬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은 노태우 당 대표이자 대선후보를 만나 직선제 개헌 등을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면담 때 말할 내용을 적은 문서.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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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건은 매우 내밀하게 다뤘을텐데 어떻게 보관할 수 있었나?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부서를 옮길 때나 사회적 격변이 일어날 때 다 불태우거나 찢어버리는데 나는 그런 것을 다 모아두다 보니 남아 있게 된 거 같다.”
이종찬은 이런 버릇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그가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을 마치고 1999년 민주당 부총재로 당에 복귀했을 때였다. 당시 개인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을 <평화방송> 기자 이도준이 몰래 빼내 한나라당 의원 정형근에게 가져다 줘서 이른바 ‘언론장악 문건’ 사태가 터졌다. 이로 인해 그가 국정원 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결국 국정원이 그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문건을 회수해 갔다. 모든 당직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는 정보나 기록을 사적 목적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쪽에 줄섰던 국정원의 간부(엄익준)와 하급 직원 한 명을 자신이 국정원장으로 있는 동안에 끝까지 기용하지 않은 것도 이런 원칙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기에 최근 청와대 특감반 출신의 검찰 수사관(김태우) 사건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정보를 가지고 승진이나 출세에 이용하려는 자는 엄벌해야 한다. 정보는 그 자체로 사용해야지, ‘너에 관해서 내가 좀 알고 있어’라는 식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종찬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우당 이회영의 손자다. 1936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난 이종찬은 어릴 때부터 김구, 작은 할아버지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 속에서 자랐다. 육사를 졸업한 뒤 군 정보장교와 중앙정보부를 거쳐 민정당 의원(4선)을 지냈다. 그는 중앙정보부 시절 시인 김지하를 지원하고, 민주화운동가 조영래가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1992년 당내 대선 경선의 불공정성에 항의해 탈당했다가 1995년 민주당에 합류했다. 이후 디제이피(DJP=김대중과 김종필, 박태준) 연합에 기여하는 등 1997년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97년 대선 기록은 이전에 김대중도서관에 다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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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전 국정원장)이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1945년 임시정부 환국을 앞두고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속에서 둘째줄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며, 앞줄 가운데 하얀 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들고 선 소년이 이종찬 위원장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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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매일 기록해”
-원로 정치인으로서 요즈음 정치를 어떻게 보나?
“여야 모두 답답한데 우선 보수가 정신 차려야 한다. 보수가 흐물흐물하면 진보도 동시에 내려가는데 지금이 딱 그렇다. 한국 정치의 위기다.”
-어떤 면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건가?
“자유한국당은 시시하게 친박이니 뭐니 하지 말고 보수의 가치부터 세워야 한다. 원래 보수는 애국적이고, 진보는 국제적이지 않나.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거꾸로 됐다. 보수가 집회에 태극기 뿐 아니라 성조기와 심지어 이스라엘기까지 들고 나간다.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건 좋은데 내셔널(민족) 주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없이 종노릇하자고 동맹을 맺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건 보수가 아니라 타락한 보수다. 김세연 의원이 최근에 얘기를 잘 했더라.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보수는 독이라고 말이다.”
-민주당은 어떤가?
“민주당은 대통령한테 할 얘기를 해야 한다. 자꾸 움츠려들고 찬양가만 불러서는 여당이 왜 있나. 대통령이 소통이 안 된다면 소통을 시킬 사람이 누구냐. 여당 중진들이다. 왜 불러주길 바라느냐. 면담을 신청해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얘기해줘야 한다. 이런 식이면 민주당은 다음 선거가 어렵다.” ?정치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떤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속물적인 타협을 하지는 않았다. 어느 자리에 있든 내 자신의 가치를 찾고 만들어서 지키려 노력했다. 그래서였는지 역대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형무소에 가는 등 모두 다 격변을 거쳤는데 나는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 그런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종찬은 요즈음도 매일 일기를 쓴다. 이날 인터뷰 상황도 기록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졌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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