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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19 18:29 수정 : 2018.11.19 19:12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내 가장 큰 고민이 북핵과 노동 문제입니다. 북핵 문제는 가닥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데, 노동 문제는 참 고민입니다.”

대통령이 노동비서관을 관저로 불러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꺼낸 말이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의 심경처럼 보이지만, 실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얘기다. 참여정부에서 노동비서관을 지낸 권재철씨가 쓴 <대통령과 노동>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을 보면, 노 대통령은 재임 중 몇차례 금연을 시도했다 다시 피우곤 했는데 그 주된 이유가 노동 문제로 인한 고민 때문이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권양숙 여사가 “노동 문제 복잡한 거 알지만, 노동비서관만 오면 대통령이 담배를 피우시니 (관저에) 안 왔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을까 싶다.

참여정부가 흔들리기 시작한 계기가 2003년 화물연대 파업이었다. 그 후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과 정부 관계는 계속 악화되며 노 대통령을 괴롭혔다. 민주노총은 끝내 사회적 대화 기구인 노사정위원회에 들어오지 않았다. 2006년 12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노사관계 선진화 입법은 의미있는 타협이었지만, ‘절반의 성공’이었다. 양쪽의 감정의 골은 돌아올 수 없는 강처럼 깊이 파였다.

2017년 10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노동계 만찬에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왼쪽)이 건배사를 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세월은 흘러 진보 정권이 다시 집권했지만, 정부와 노동계 관계는 10여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민주노총은 내일(21일) 탄력근로제 확대 저지 등을 내걸고 총파업에 나선다. 청와대 앞 시위에선 “대통령 나와!”라는 외침이 거침없이 터진다고 한다. 정부여당 대응도 수위가 높아졌다. 민주노총을 두고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화를 해서 뭐가 되는 곳이 아니다”라고,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더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리적 충돌은 없지만, 오고 가는 말로만 보면 과거 정권 시절을 연상시킨다.

이 틈새를 비집고 보수 진영의 ‘민주노총 때리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요즘 보수 신문엔 민주노총의 ‘불법’ 시위·점거농성 기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크게 실린다. 그러면서 ‘경찰이 방관만 한다. 민주노총 공화국이냐’고 공격한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아예 “정부는 민주노총과 결별하라. 그러면 도와주겠다”고 요구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지만, 안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손해 볼 건 없다.

이런 비난은 의도적이고, 정략적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이다. 손쉽게 ‘불법’ 딱지를 붙이는 것 자체가 국민 기본권을 부인하고 싶은 발상의 연장선에 있다. 경찰이 왜 불법을 단속하지 않느냐고 비난하지만, ‘불법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집회·시위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검찰총장이 시위대 탓에 뒷문으로 출퇴근해 모양새를 구겼을진 몰라도, 충돌을 불사하며 집회를 강제 해산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그런 식의 비난이 가당치 않다고 해서 민주노총의 아픈 지점을 가릴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문제는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소극적이라는 인식이다. 대기업과 공기업 노조를 주축으로 한 민주노총은 어느새 ‘기득권을 가진 집단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게 사실이다.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는 “민주노총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라고 멋지게 받아쳤지만, 그것으로 아픈 부분을 완전히 덮기는 어렵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 기구를 ‘규제 완화와 노동 개악을 밀어붙이기 위한 장’으로 보는 듯싶지만, 밖에선 ‘민주노총이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 참여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광주형 일자리’를 반대하는 건 그런 상징적 사례로 비친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정 갈등의 핵심 원인은 ‘신뢰의 상실’이었다. 22일 출범하는 사회적 기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민주노총이 복귀하는 관건 역시 ‘신뢰’일 것이다. 그 레일을 깔 책임은 우선 정부에 있다. 최근 여권에서 나온 발언들은 ‘현 정권이 민주노총을 아예 배제하려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이 점을 정부는 잘 인식하고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

분명한 건, 지금 분출하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현안이 노사민정이 함께 논의해서 방향을 찾는 ‘사회적 대화와 타협’ 없인 한걸음도 전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의 무거움을 안다면 정부와 노동계 모두 믿음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에 집중할 때다. 문재인 정권이 과거 정권과 다른 건 그래도 대화를 해볼 만하다는 점일 것이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경사노위 참여 여지를 닫지 않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 2003년보다는 몇 걸음 전진한 2018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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