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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가 소의 귀를 닮은 우이도는 비단결 고운 모래가 펼쳐진 무공해 해변을 자랑한다. 사진은 성촌해변 일대 모습.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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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재언의 섬
② 우이도
자연이 빚어낸 동양 최대 모래언덕
개흙 섞이지 않은 모래해변 장관
1745년 축조된 옛 포구 진리선창
정약전 유배생활 자취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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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가 소의 귀를 닮은 우이도는 비단결 고운 모래가 펼쳐진 무공해 해변을 자랑한다. 사진은 성촌해변 일대 모습.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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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동양 최대라고 알려진 80m 높이의 모래언덕을 자랑하는 섬. 최근 한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의 촬영 무대가 돼 커다란 관심을 끌고 있는 섬…. 주인공은 서쪽 양단에 돌출한 2개의 반도가 마치 소의 귀(牛耳)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이 정해진 우이도다. 우이도는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약 65㎞ 떨어져 있는 섬으로, 목포를 기준으로 뱃길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3배인 10.704㎢, 해안선 길이는 21㎞, 최고 높이는 359m에 이른다. 2015년 기준으로 87가구 152명의 섬사람이 모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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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섬이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과 한국의 하멜이라 일컬어지는 홍어 장수 문순득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고, 최고의 비경이라 할 3개의 해수욕장과 80m 높이의 신비롭기 짝이 없는 모래언덕도 우이도만의 매력이다. 그럼에도 교통편이 불편해 외지인의 발길이 비교적 닿지 않은 편이다. 어쩌면 열악한 교통환경이 도리어 자연 훼손을 막아 정성껏 보전하는 데 보탬을 줬는지도 모르겠으나…. 온통 산지로 이뤄져 육로가 더 불편한 탓에, 주민들은 이웃 마을과의 왕래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다. 주민들은 이웃 마을을 오갈 때 아예 여객선을 이용한다. 마을마다 선착장 시설이 발달해 그나마 이동에 따른 불편을 조금 덜어주고 있다.
80m ‘모래산’의 절경
우이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모래언덕은 돈목마을에서 성촌마을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성촌해변과 돈목해변 사이에 마치 사막처럼 커다란 사구가 형성된 채로 있다. 주민들은 산태라 부른다.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모래가 모래언덕에 쌓이면 한쪽에서 침식작용이 일어나고 다시 퇴적하는 자연의 신비를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신비로운 모래언덕을 두 눈으로 지켜본 것만으로도 우이도를 찾은 벅찬 감동이 일렁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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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목마을 앞 80m 높이의 모래언덕.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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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구의 수직고도는 약 50m, 경사면의 길이는 약 80m다. 더러 경사도가 70도를 넘는다는 둥 다소 과장 섞인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으나, 실제 경사도는 32~33도 안팎이라고 한다. 80m의 ‘모래산’은 비와 바람에 의해 매일같이 그 형태가 변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경사가 가파른 모래산을 오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 후에야 비로소 모래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모래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우이도의 절경은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이도를 다시 찾았을 때 이곳을 밟아볼 순 없었다. 멀찍이서 지켜볼 뿐. 모래언덕 침식이 심해 탐방객들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일부 관광객들이 썰매를 타듯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적잖이 훼손된 데 따른 불가피한 조처다. 이런 희귀한 생태환경을 보존하고자 하는 시민의식이 희박했던 것은 큰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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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우이도 전경. 신안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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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목마을 가는 길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상산봉(359m)이 보인다. 우이도의 최고봉으로 온통 바위로 된 산이다. 다도해를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고,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이다. 상산봉 자락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곳곳에 군락을 이룬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돈목마을이다. 모래사장으로 계곡물이 퍼져 흐르기 시작하는 지점의 둔덕에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세운 선박 형상의 샤워장이 있다. 그 앞에 나무로 된 다리에 이어 긴 모래해변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돈목해수욕장이다. 1500m 길이의 백사장에는 비단결처럼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다. 물기가 가득한 모래밭. ‘우이도 처녀들은 모래 서 말을 먹고 시집간다’는 속설이 이해가 갈 정도다.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곳 말고는 죄다 모래땅일뿐더러 대부분의 해수욕장도 개흙이 거의 섞이지 않은 말 그대로 모래해변이다.
눈앞에 펼쳐진 건 오로지 바다와 백사장 그리고 언덕만 있는 무공해 해변이다. 완만한 경사의 넓은 백사장과 잔잔한 파도는 서해안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물이 빠진 백사장에서는 동네 아낙들이 허리를 숙인 채 모래를 뒤지고 있다. 우이도에서만 난다는 은빛 조개를 캐는 장면이다. 쫀득쫀득 씹히는 맛이 일품인 조개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섬에서만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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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물이 빠진 해안에서 바지락을 캐고 있는 모습.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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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언덕의 반대편, 즉 섬의 동쪽엔 진리마을이 있다. 우이도의 중심지답게 마을 규모도 크고 마을 앞에는 튼튼한 방파제가 포구를 둘러싸고 있다. 우이도 출장소 등 각종 행정 및 편의시설이 모여 있다. 비록 모래언덕의 유명세로 인해 우이도를 찾는 사람들의 관심이 돈목해수욕장이 있는 돈목마을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긴 하지만.
갈림길에서 조금 더 가면 왼쪽에 조그마한 포구가 있다.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된 옛 포구 진리선창이다. 1745년에 축조된 선착장으로 지금껏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잘 보존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형태가 온전히 보존된 유일한 전통 포구시설로 꼽히는, 보기 드문 해운 관련 문화유산이다. 선창기념공원에는 시주자 명단을 새긴 비석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선창기념공원이 만들어진 이유를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다. 선창은 길이 63m, 높이 3m, 폭 1.6m 규모의 석축으로 현재도 선박의 안전한 피항처로 활용되고 있으며, 예전에는 선박의 건조와 수리 장소로도 이용됐다. 선창의 중건 시기를 알려주는 석비 비문에는 조선조 1745년(영조 21년)에 마을주민 25명이 참여해 선창을 중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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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 조선 영조 때 축조된 옛 포구 진리선창. 우리나라에서 형태가 거의 온존하게 보전된 유일한 전통 포구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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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도 여럿 있다. 우선 <표해록>의 주인공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이 떠오른다. <표해록>은 목포해양대 국문학과 최덕원 교수가 우이도에 거주하는 주민 문채옥씨의 집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귀중한 책이다. 정약전이 <표해시말>이란 이름으로 펴낸 책엔 우이도 홍어 상인 문순득 일행이 일본 오키나와를 비롯해 필리핀과 마카오를 두루 거쳐 1805년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3년2개월 동안 경험한 내용(표해록)이 담겨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국내 표류기 가운데 이 지역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이다. 앞서 성종 시기 최부가 지은 <표해록>과 1770년 제주 출신 장한철이 지은 <표해록>(표해기)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손꼽히는 해양문학 작품이다. ‘유구 및 여송 표류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주인공인 문순득을 포함한 우이도 주민 6명이 표류해 유구, 곧 오키나와와 여송(일본), 그리고 필리핀까지 가서 겪은 일들을 글로 적은 것으로, 이들이 돌아온 후에 당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에게 말로 전해 글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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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하멜’이라 불리는 홍어 장수 문순득 동상.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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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문순득의 생가는 거의 버려진 듯 방치돼 있었다. 돌담으로 된 슬레이트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사방을 양철판으로 가려놓아 누가 보아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귀중한 출판문화를 보전한다는 차원에서라도 세심한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꽃상여 대신 배에 실려 고향으로
후대에 <자산어보>라는 귀중한 선물을 안긴 정약전의 자취를 더듬는 것도 우이도에서 빼놓을 수 없다. 진리에서 돈목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밭을 넘으면 갈림길. 비포장도로인 이 길을 따라가면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마을과 동떨어져 한적하기 그지없는 띠밭너머해변이다. 이름에 등장하는 띠라는 풀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 김 등을 말릴 때 깔개로 사용해오던 깔개 재료인데 인근에 띠가 많아서 띠밭너머해변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 가지 않아 정약전 서당터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진리에서 돈목으로 넘어가는 산길 초입 서당골이라 불리는 이곳에 정약전이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이도는 19세기 이 섬으로 유배를 온 정약전이 저술한 <자산어보>의 배경지다. 정약전은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왔다가 이곳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손암 정약전(1760~1816)은 천주교도 탄압이 있던 신유사옥(1801) 당시 이곳으로 유배돼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물고기와 해산물 등 총 227종의 어족연구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2살에 문과에 급제해 병조 좌랑까지 올라 왕명으로 <영남인물고>를 펴낸 학자. 홀로 우이도라는 외딴섬으로 유배 온 정약전은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을 것 같은 정약전.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잡고 해초며 조개, 소라와 전복들을 따던 정약전은 해양생물의 생태를 조사해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 학서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가족들과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뒤로한 채 귀양살이에서 미처 풀려나지 못하고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숨을 거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로운 섬에서 쓸쓸하게 죽어 간 그의 주검은 온 섬사람들의 애도 속에 꽃상여 대신 배를 타고 고향길에 올랐다고 한다. 정약전의 비극적인 삶과 슬픈 이야기를 마음속에 들려주는 듯 파도소리가 애처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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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 주민들이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말리는 모습.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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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민이 그물에 걸린 숭어를 끄집어내고 있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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