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1 18:05
수정 : 2005.02.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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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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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배신. 근대 한국 종교는 이렇게 굴절의 연속이었다.
총칼이 가기 전 정신과 사상이 먼저 가는 것이 침략사다. 그래서 한반도에 밀려드는 외세 앞에 가장 먼저 ‘시험’을 받은 게 종교였다.
종교 집단은 자기반성엔 더디고 자기 우상화엔 발 빠르다. 그래서 일반인이 그들의 과거사를 꿰뚫어보기 어렵다.
언론인과 교수를 지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은막 뒤에 감춰졌던 근대 종교의 행적을 무대 위에 올렸다. ‘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사’란 부제를 붙인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란 책이다.
이 땅에 들어온 지 200년이 넘은 천주교는 초기 100년 동안 제사를 거부해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초기 한국 천주교 지도자였던 황사영은 1785년 청나라의 구베아 주교에 보낸 편지에서 서양 군대의 조선 침략을 요청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한 행동이었지만, 국가적으로는 반역 행위였다. 또 천주교인인 안중근이 조선 침략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당시 한국 천주교의 대표자인 뮈텔 주교는 신자의 자격을 박탈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까지 거부했다.
새물결 천주교에 맞선 기득권 유교는 공자교와 대동학회를 조직해 일제의 전위부대로 나섰다. 변혁기 헤게모니 싸움의 양 주역이던 천주교와 유교는 3·1운동 지도자 중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33명 지도자는 개신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이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외세와 부패 왕조에 저항하는 동학혁명을 이끄는 과정에서 30만~40만 명이 목슴을 잃었다. 국권을 잃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나철은 매국노들의 처단을 위해 자신회를 조직하고, 처단이 실패한 뒤 대종교를 창건했다. 그는 1916년 일제의 학정에 통분해 자결했으나 김좌진과 이범석, 홍범도, 이시영, 신채호, 정인보, 최현배, 이상설, 이동년, 신규식 등의 대종교인들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조선의 배불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계는 일본 일련정종 승려에 의해 도성 출입을 허락받게 되면서 해인사, 통도사, 보현사 등이 일제에 군용기 한 대씩을 헌납하는 등 매불 친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한일병탄 뒤 국내에서 유일한 저항세력으로 남아 있던 개신교인들은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과 105인 사건 조작 등으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또 혼란기에 치병과 기복으로 민중을 현혹한 사교, 백백교 등의 종교의 천태만상을 보여준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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