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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7 16:47 수정 : 2005.01.07 16:47

‘영한사전비판’낸 이재호 교수

‘여병’ 또는 ‘병발증’이란 단어를 접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영어단어 ‘complications’의 뜻을 묻는데 너무나 친숙한 말인 ‘합병증’ 대신 이런 생소하기 짝이 없는 말을 가르쳐준다면? 웃기는 일이겠지만 이것이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우리 영한사전의 현실이라면 그냥 웃어넘길 일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러면 ‘multiplication table’은? 영한사전에 따르면 ‘곱셈표’나 ‘구구표’로 나와 있다. 정작 ‘구구단’은 빠진 채. ‘사회복지사’로 써야 맞는 ‘social worker’는 ‘사회사업가’로 나와 있고, 여성용 구두 ‘하이힐’(high heels)은 수록조차 안 되어 있다. 인기 스포츠인 ‘래프팅(rafting)’이나 ‘자유무역협정’을 뜻하는 ‘FTA’도 우리 영한사전을 뒤져서는 찾기 어렵다.

어이없게도 우리 영한사전의 실정이 이렇다. 문제는 이런 오류나 허점이 대부분의 영한사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적인, 그리고 태생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영문학자인 이재호(70)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같은 영한사전의 구조적 문제에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지난 2000년에는 ‘영한사전의 문제점’이란 논문까지 써서 이 문제를 알렸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결국 책을 펴내 정면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영한사전의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곁가지로 자연스럽게 교양의 향기를 풍성하게 전해주는 색다른 책 <영한사전비판>이 나오게 된 사연이다.

이 교수가 영한사전의 문제를 인식한 것은 이미 30여년 전인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한 영한사전에서 영어 낱말 ‘sir’를 찾아봤는데, 뜻풀이에는 뜻밖에도 ‘경(卿)’이란 번역어가 없었다. 어처구니없어 메모해둔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번역 작업 도중 사전에서 비슷한 문제점들을 계속 발견했고, 이를 하나하나 적어두었다. 출판사에 알려 몇몇 오류는 잡았지만, 전체적 차원에서 보면 ‘쇠귀에 경읽기’였다. 원인이 근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영한사전의 가장 큰 결함은 번역어에 순수한 우리말이 많이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chain smoker’의 번역어에 ‘골초’가 빠져있고, ‘echelon’에는 ‘사다리꼴’ 대신 ‘제형(梯形)’이라고 풀이되어 있어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우리 스스로 영한사전을 만들기보다는 영일사전을 다시 번역했기 때문에 우리는 쓰지 않는 한자어나 어색한 번역어가 수두룩하고 실제 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번역어가 앞에 오지 않고 아예 빠지게 된 겁니다.”

이 교수는 사전을 고치는 작업은 출판사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므로 하루빨리 국가가 나서 영한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해방 이후 58년 동안 국가가 사전에 투자한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을 빼면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다른 사업은 쉽게 투자하면서도 자기나라 문화의 기본틀을 세우는 데에는 인색했던 것이지요.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국어사전>보다 <영한사전>을 더 자주 쓰게 됩니다. 영한사전에 순우리말을 찾아 수록하는 것은 우리 언어생활을 지키고 지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아무리 떠들어봤자 사전들이 부실하면 문화가 올바르게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기 바랍니다.” ­궁리/1만원.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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