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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7 16:58 수정 : 2005.01.07 16:58

사대부의 시대

/고지마 쓰요시

잘 아는 이들에게 평소 양명학에 관심 있었다고 하면 대체로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거기까지 촉수가 뻗어있을 줄 미처 몰랐다는 투다. 그리하여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게 되니,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내가 양명학을 알게 된 것은 먼저 김교빈의 <한국철학에세이> 때문이다. 하곡 정제두 편에서 김교빈은 “그 많은 강화학파들이 민족의 위기에서 한 사람도 변절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으로 실천한 것은 그들의 학문이 양명학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조선말기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양명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기현이 해설한 <대학>은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신민(新民)이냐 친민(親民)이냐를 두고 주자와 왕양명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더랬다. 나는 주자를, 어디까지나 내 식으로, 근대적 계몽주의자로, 왕양명은 탈근대적인 반계몽주의자로 평가했다.

읽을거리가 너무 많은 것이 탈이었다. 민영규의 <강화학 최후의 광경>과 김미영이 옮긴 <대학>을 읽고나서는 한동안 양명학 관련책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고지마 쓰요시의 <사대부의 시대>를 만나면서 양명학에 대한 관심의 불씨를 되살리게 되었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비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늘 스스로 채찍질을 하면서도 끝내 고치지 못하는 병폐가 있다. 그 책의 고갱이에 바투 다가서지 못하고 언저리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즐기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번에도 예의 그러했다. ‘성즉리와 심즉리’ ‘격물과 친민’ ‘천리와 인욕’과 같은, 두 학파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열쇳말에 대한 이해보다는, ‘주자와 왕양명의 생애’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 탓이다. 나의 학문적 깊이가 이토록 얕구나 하며 혀를 끌끌 찰 일인데, 그럼에도 그 대목을 흥미롭게 읽은 데는 이유가 있다. 주자와 왕양명의 삶을 그린 글이 정약용과 박지원을 비교한 고미숙의 글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지은이는 주자가 주류가 되고자 했던 방계출신의 인물이었고, 왕양명은 타고난 문화귀족으로 주류의 사상문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주자학은 “벼락출세를 이룬 허영의 산물”이고, 양명학은 “방탕한 자식의 도락”이었다.

주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양명학이 괄시를 받은 터라, 개인적으로 두 학파의 차이점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허나 이 책은 단호할 정도로 두 학파의 공통점을 힘주어 말한다. “역점을 두는 방식이 조금은 다르나 사고의 기반은 공유”하고 있으며, 양명학은 주자학의 연장된 형태일 뿐이란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 주장이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강화학파의 저항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거듭 읽으며 내가 다다른 결론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주자학은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표나게 내세웠다. 앎을 행한다, 는 이 단순한 명제가 강화학파의 ‘지조’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껏 내린 결론을 스스로 미심쩍어 하는데, 신영복이 <강의>에서 이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강화학파는 무엇보다도 지행합일을 강조하였고 구한말의 현실에 무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이제 비로소 알겠다. 책 읽는 이의 덕목은 ‘앎의 쌓임’에 있지 않고 ‘앎의 실천’에 있음을. 새해 벽두, 평생 화두로 삼을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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