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병근(43)씨의 두 번째 시집 〈번개를 치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정병근씨의 시들은 현실의 비루함과 추악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가운데 빚어진다. 시인이 포착하여 묘사하는 현실의 단면들은 결코 아름답거나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달리 치장하는 대신 열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납한 바탕 위에서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구가하고자 한다.
“핏발 선 눈과 눈이 딱 한 번 마주치던 찰나와/다부진 망치 소리와 나무 둥치 쓰러지는 소리와/부산하게 씻어내던 물소리를”(〈폐도축장〉)
“육교 계단에 벌겋게 토해놓았다/출렁이던 고통이 할복했다//코를 풀면서 치를 떨면서,/쏟아진 내장을 수습한 그가/어둠 속을 뚜벅뚜벅 걸어갔다”(〈흔적〉)
짐승이든 인간이든, 숨 붙은 모든 중생이 대면해야 하는 삶의 진상인즉, ‘고통’이라는 낱말로 요약 가능한 성질의 것이다. 1988년 〈불교문학〉을 통해 처음 문단에 나온 시인에게는 삶이 불가에서 말하는 고해인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축복이고 축제라고 시인에게 말해 보아야 그닥 소용이 없다.
비명과 고통의 열악한 삶
회피도 않고 치장도 않고
다뜻한 연민의 시선 던져
그렇다면 시인은 비관주의자인가. 삶이라는 고해에 빠진 존재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태도를 비관주의라 이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연민은 낙관을 향한 소극적인 안간힘이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즈음의 시들이 자연과 식물을 예찬하는 생태주의적 경향에 쏠려 있는 것과 구별되게 정병근씨가 가긍한 처지의 사람들을 즐겨 시의 소재로 삼는 데에서 그의 연민은 잘 드러난다.
“의자에 앉을 때는 의자 무늬로 몸을 바꾸었고/벽에 기댈 때는 벽이 되었다/흥건한 얼룩이 되어 바닥에 누웠다/아무도 그를 눈치 채지 못했다”(〈노숙 1〉)
“시퍼런 칼을 들고 밤새 우는/목포홍탁, 늙은 그 여자”(〈목포홍탁, 그 여자〉)
그라고 식물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집 앞부분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시들에서 그 식물들은 ‘동물적’이라 할 만한 공격성과 욕망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어디든 뻗어가는/위험한 채찍이다”(〈덩굴의 노선〉)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모가지에 벌겋게 독 오른 놈들/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여뀌들〉)
식물들이 이처럼 포악해진 것은 왜일까? “두 손 묶인 채/개 패듯이 맞는 떡갈나무 어머니”(〈도토리 사냥〉)에서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식물들 역시 동물적 폭력과 살육이라는 현실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까닭이다.
비명과 눈물로 점철된 시집에도 한가닥 구원의 성소는 마련되어 있다. 맨 뒤에 배치된 시 〈머나먼 옛집〉에서 노래되는 고향 집이 그곳이다. 그러나 그 집은 “땡볕 속을 천 리쯤 걸어가면/돋보기 초점 같은 마당이 나오고/그 마당을 백 년쯤 걸어가야 당도하는 집”이며 “지금부터 가면 백 년도 더 걸리는 집/내 걸음으로는 다시 못 가는,/갈 수 없는, 가고 싶은” 집이다. ‘갈 수 없다’는 상황이 아니라 ‘가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 마음의 힘으로 시인은 옛집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시는 그 발자국들이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