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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8 18:34 수정 : 2005.03.18 18:34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글이 아니었다. 마른 하늘 날벼락이었다. 정수리에 꽂히는 대침이었다. 장막을 가르는 칼날이었다. 언론인 리영희(76)씨가 쓴 모든 글들의 글자 하나하나는 과녁을 뚫고 지나는 탄환, 어둠을 흔들어 깨우는 타종이었다. 책이 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의 책이야말로 극우반공체제를 통째로 밀어버린 불도저의 동력이었다. 그는 청년 학생들에겐 ‘사상의 은인’이었고, 반공권력자들에겐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한 시대 진보의 최전선이었던 그에게 지난 몇 년은 암흑의 심장에서 막 빠져 나오는 시기였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의 햇살에 막 몸을 적시던 시기였다. 그의 정신이 사상의 감옥 바깥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을 때 난데없는 ‘손님’이 그의 육신을 거꾸러뜨렸다. 2000년 11월 그는 중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됐다. 일흔의 노구로 그는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바깥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일어섰고 잃었던 언어기능을 되찾았고 걸음을 옮겼다. 가장 명철한 지식인으로서 그는 40여년 동안 수없이 많은 발언을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에게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서전을 내야 한다는 출판사의 거듭된 요청에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글을 쓸 수 없어 말로 풀기 시작했다.

통념 뒤엎는 책과 글로 어둠을 깨운 지식인으로 스스로 사는 자유인으로
이제는 병마와 싸우는 인간 리영희 걸어온 길

%%990002%%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그렇게 해서 2년 반 만에 완성된 인간 리영희의 회고록이다. 그가 살아온 삶은 한반도의 비극과 격동의 20세기와 그대로 포개진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을 겪고 동족상잔의 참상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이승만 독재와 뒤이은 30년 군사독재의 칠흑 같은 터널을 통과했다. 그 참담한 시대를 그는 눈 맑은 학생으로, 유엔군 통역장교로, 신문기자로, 대학교수로, 그리고 무엇보다 펜을 쥔 지성인으로 살았다. 진실이 아니면 타협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겐 국가권력의 감시·연행·취조·투옥이 일상이었다. 병마와 싸우는 불편한 정신이 온전히 구술하기엔 체험의 양이 너무 많았다. 10여년 터울로 그와 동시대를 산 문학평론가 임헌영(64)씨가 방대한 현대사·개인사의 자료를 정리해 대담자로서 자서전 주인공의 구술을 도왔다. 대담자는 구술자의 희미해진 기억을 복원시켜줄 뿐만 아니라 나름의 관점으로 구술자의 정신을 자극함으로써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베트남 전쟁> 등등 그의 모든 책과 글을 관류하는 공통의 특성은 동시대인의 통념을 뒤엎는 진실의 힘에 있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외친 ‘동굴 속 절규’은 이제껏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모든 한국인들이 ‘반공성전’인 줄로만 알았던 베트남 전쟁이 핍박받는 민중의 처절한 민족해방전쟁임을 처음으로 알린 것도 그였고, ‘공산 오랑캐’의 나라인 줄로만 알았던 사회주의 중국의 현대사에 처음 눈뜨게 한 것도 그였다.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절대우위인 줄로 철썩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실은 정반대임을 1980년대 그의 논문은 처음으로 폭로했다. 서해의 ‘북방한계선’이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려는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남한의 북침을 막으려고 유엔군이 그어놓은 ‘남한군 출입금지선’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을 알린 것도 일흔 고개에 이른 그 노지식인이었다.

%%990003%% 이 비타협적 진실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도 자서전 곳곳에서 주저없이 털어놓는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술기운에 권총을 꺼내들고 호기를 부리다가 진주 기생의 위엄 있는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일, 강원도 전선의 건봉사에 만난 스님에게 총구를 들이댔다가 생사를 초탈한 듯 자신을 타이르던 모습에서 한없는 수치심과 함께 감동어린 깨달음의 기쁨을 얻은 일 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일시에 휴머니즘의 투사가 된 것이 아니라 천천히 깨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저항정신을 물려받은 딸이 전두환 폭압기에 대학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하며 숨어다니다 2년 만에야 얼굴을 보인 일을 말하는 대목에선 가족사의 한 풍경이 엿보인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행보를 스스로 결정한 ‘자유인’이었고, 그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때의 자유는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필경 ‘형벌’이었다.

늙마에 찾아든 중풍도 그 형벌 가운데 하나였을까. 경기도 산본의 자택에서 방금 제본소를 빠져나온 자서전을 앞에 두고 만난 그는 자신이 아직도 병마와 싸우는 중이라며 복잡한 현실상황을 밀어두고 ‘개구리’ 이야기를 했다. “아침 신문을 보니 개구리가 얼어죽었대요. 우수 경칩이라고 나왔다가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까 얼어죽었다는 거예요. 가슴이 아팠어요. 조금만 더 있다 나오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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