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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2 18:13 수정 : 2005.01.12 18:13

연암산 정상 아래 숨어있는 천장암. 그러나 30여미터만 벗어나면 안면도 앞 바다까지 시야가 툭 터진다.



몸으로 법문 쓴 ‘중생의 머슴’

충남 서산군 고북면 장요리. 고북저수지의 맑은 물에 비친 그림자를 뒤로 하고 연암산에 오른다. 지금 오르던 산등성이는 벌써 세상과 담이 되어 있다. 능선으로 켜켜이 포개진 산 속에 천장암은 숨어 있다. 경허와 수월이 앉았던 제비바위 위에 오르니 안면도 앞 서해바다까지 온 천하가 시원하다. 그러나 바깥 세상에서 이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을 감춘 암자’인 천장암인가 보다. 나무꾼 선사 수월 또한 세속인이 엿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경허 선사의 맏상좌(첫제자)로 그 시대 가장 존경받은 선사였지만 그는 글 하나 법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근대의 고승 중 가장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다.

수월은 인근 고을에서 머슴을 살다가 30살이 다되어 천장암의 불목하니(절 머슴)로 들어왔다고도 하고, 10대에 입산했다고도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이 발행하던 <불교>는 수월이 북간도에서 열반한 6개월 뒤에야 열린 추도식에 즈음해 ‘전 조선을 통하여 현대의 유일한 대선지식이신 전수월 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보도해 그가 1928년 열반한 것은 확실시되지만, 그가 태어난 때는 확실치 않다. 경허보다 9살 적은 1855년생설이 주로 전해진다.

머슴 살다 서른무렵 입산
나무하고 방아찧고 궂은일
후일 북간도서 중생 보듬어
한용운 “대선사 열반” 탄식

이 허름한 천장암 대웅전 옆 구석엔 계룡산 동학사에서 생사를 넘은 경허가 다시 1년여 동안 씻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며 보임(깨달음 이후의 정진)해 마침내 태평가라는 깨달음의 노래를 부른 1평짜리 방이 있다. 이곳은 불교 역사상 다시 보기 어려운 수월, 혜월, 만공 등의 법기(불도를 수행할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경허가 법신(불법을 완전히 깨달은 부처의 몸)으로 빚어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 방 주위엔 가래떡처럼 모양 좋게 썰어놓은 장작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절을 안내한 혜중 스님 등 절식구들이 겨우살이용으로 해놓은 것들이다. 나무꾼 수월의 후학들답다. 수월은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방아 찧어 스승과 절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글을 몰랐던 그는 경전 공부도 못하고, ‘천주다라니’(산스크리트 원어로 된 불경)만을 외워 삼매에 들었다.

누구고 가릴 것 없이 중생에게 베푼 그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절에 손님이 오면 발 감싸개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는 아침에 신도록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메워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제로 당대 최고의 선사로 존경받던 만공은 생전에 “수월 형님만 생각하면 난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월은 늘 머슴처럼 일만 했지만 밤에 아랫마을에서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올 정도로 방광(빛이 남)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조실로 모셔졌으나 누가 조실로 부르던 머슴으로 부르던 아랑곳 없이 오직 머슴처럼 일만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숨곤 했다.

북녘을 유랑하던 수월은 1912년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갔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과 초대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은 젊은 시절 각기 따로 스승을 찾아 북간도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에게만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었다.

수월의 행적을 듣기 위해 예산 덕숭산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을 찾았다. 설정 스님은 “지금은 열반했지만 수월 선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지선 노스님’으로부터 ‘수월 선사가 천장암 아래 갈산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진 ‘全’씨가 아닌 ‘田’씨이며 독자인데 아주 어려서 출가한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또 수월의 행적을 좆아 1989년 중국을 답사했던 설정 스님은 “수월 선사가 살던 옛 간도의 고을에서 80~90살 든 노인들은 수월에 대해 자기는 없고 중생만을 위했던 자비의 화현보살로 기억하고 있었다”며 수월이 간도로 갔던 이유를 전했다.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간 곳이 간도였지요. 고갯마루에서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따뜻한 물과 밥 한술을 먹이고, 신을 삼아 보내며 생애 마지막 수십년을 헌신하다 그는 소리 없이 떠나갔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대우를 받으려하기는 커녕 오직 남의 손발 같은 머슴으로 살았던 수월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조용히 헌신하다 자취 없이 떠난 바람이었다. 가파른 산 길을 내려오니 숨이 거칠어진다. 나무가 내어준 신선한 산소를 바람이 전해준다. 숨구멍이 트인다. 이제 수월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보이는 것, 내딛는 곳이 하나같이 아낌 없이 주는 나무요, 더 없이 포근한 산이다. 서산·예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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