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감수 다수들은 어쩌지? 간혹 내 직함에 따라붙는 진보의 수식어를 정중히 사양하곤 한다. ‘좌파적’은 몰라도 ‘좌파’는 내게 걸맞지 않다. 좌파 연은 했어도 좌파였던 적은 없어서다. 게다가 나는 이 땅의 좌파를 거의 믿지 않는다. 그럼, 오른쪽? 천만에. 극우에서 보수, ‘뉴 라이트’에 이르는 이 곳의 모든 우파를 나는 혐오한다. 그래도 좌파적이기보다는 ‘중도 우’에 가깝다. 그렇다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대하는 복잡한 심경이 이렇듯 오목 볼록한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이남석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그린비 펴냄)은 내가 접한, 이 주제를 다룬 세 번째 책이다. 안경환·장복희가 엮은 양심적 병역거부〉(사람생각 펴냄)는 반대의 논지까지 담은 입론이자 총론에 해당한다. 김두식의 〈칼을 쳐서 보습을〉(뉴스앤조이 펴냄)은 ‘기독교 평화주의’에 입각해 주제를 다룬다. 사례의 종합과 평이한 서술이 돋보이는 이남석의 책은 병역거부권과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착안해 정치철학적인 접근을 꾀한다. 나는 책을 세 권이나 읽고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한다. 당위의 차원에서 그것은 백번 옳다. 소수자에게 관용을 베풀자는 이남석의 의도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가 제안하는 대체복무제의 얼개도 그렇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을 최대한 수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양심에 수반하는 시간의 비제약성 원리에 충실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의 비제약성이란 양심의 형성과 사회적 실천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위에서 대안 사이의 이론적 논의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우선 면제, 기피, 거부의 차이를 세심하게 구분하거나 우리 나라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외국의 비슷한 사례와 엮어 설명한 것은 매우 유익하다. 반면, 사회 계층과 병역 의무 이행 양태와의 상관성을 서술한 대목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계적 도식화의 우려가 있다. 또한 징병제와 군대를 만악의 근원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군필 여부에 따라 소수자를 가름한다는 논리는 비약이 심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가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대한민국 군인’이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정서적으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합법적 병역 기피와 면제, 그리고 편한 보직으로의 이동이 만연해서가 아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의심해서도 아니다. 다만, 6·25 동란의 전장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베트남의 밀림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병사와 강제징집돼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병영에서 각종 사고로 숨진 이들이 너무 억울해서다. 새삼스레 초등학교 동창 근식과 고교 동창 태일, 그리고 큰이모부와 작은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운전병으로 입대한 근식이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소원했던 태일이에 관한 우연히 전해들은 소식은 두 번이나 나를 놀라게 했다. 곱살한 그가 ‘건대 사건’에 가담했다는 것과 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월남전에 나갔던 큰이모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짐작되는 질병으로, 작은형은 군복무 중 얻은 중증 질환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원, 세상에! 내 주변에 군 생활이 직간접 원인이 된 이른 죽음이 이리도 많았다니.
책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 /이남석 |
희생감수 다수들은 어쩌지? 간혹 내 직함에 따라붙는 진보의 수식어를 정중히 사양하곤 한다. ‘좌파적’은 몰라도 ‘좌파’는 내게 걸맞지 않다. 좌파 연은 했어도 좌파였던 적은 없어서다. 게다가 나는 이 땅의 좌파를 거의 믿지 않는다. 그럼, 오른쪽? 천만에. 극우에서 보수, ‘뉴 라이트’에 이르는 이 곳의 모든 우파를 나는 혐오한다. 그래도 좌파적이기보다는 ‘중도 우’에 가깝다. 그렇다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대하는 복잡한 심경이 이렇듯 오목 볼록한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이남석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그린비 펴냄)은 내가 접한, 이 주제를 다룬 세 번째 책이다. 안경환·장복희가 엮은 양심적 병역거부〉(사람생각 펴냄)는 반대의 논지까지 담은 입론이자 총론에 해당한다. 김두식의 〈칼을 쳐서 보습을〉(뉴스앤조이 펴냄)은 ‘기독교 평화주의’에 입각해 주제를 다룬다. 사례의 종합과 평이한 서술이 돋보이는 이남석의 책은 병역거부권과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착안해 정치철학적인 접근을 꾀한다. 나는 책을 세 권이나 읽고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한다. 당위의 차원에서 그것은 백번 옳다. 소수자에게 관용을 베풀자는 이남석의 의도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가 제안하는 대체복무제의 얼개도 그렇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을 최대한 수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양심에 수반하는 시간의 비제약성 원리에 충실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의 비제약성이란 양심의 형성과 사회적 실천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위에서 대안 사이의 이론적 논의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우선 면제, 기피, 거부의 차이를 세심하게 구분하거나 우리 나라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외국의 비슷한 사례와 엮어 설명한 것은 매우 유익하다. 반면, 사회 계층과 병역 의무 이행 양태와의 상관성을 서술한 대목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계적 도식화의 우려가 있다. 또한 징병제와 군대를 만악의 근원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군필 여부에 따라 소수자를 가름한다는 논리는 비약이 심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가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대한민국 군인’이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정서적으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합법적 병역 기피와 면제, 그리고 편한 보직으로의 이동이 만연해서가 아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의심해서도 아니다. 다만, 6·25 동란의 전장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베트남의 밀림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병사와 강제징집돼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병영에서 각종 사고로 숨진 이들이 너무 억울해서다. 새삼스레 초등학교 동창 근식과 고교 동창 태일, 그리고 큰이모부와 작은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운전병으로 입대한 근식이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소원했던 태일이에 관한 우연히 전해들은 소식은 두 번이나 나를 놀라게 했다. 곱살한 그가 ‘건대 사건’에 가담했다는 것과 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월남전에 나갔던 큰이모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짐작되는 질병으로, 작은형은 군복무 중 얻은 중증 질환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원, 세상에! 내 주변에 군 생활이 직간접 원인이 된 이른 죽음이 이리도 많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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