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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4 17:34 수정 : 2005.01.14 17:34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강북이오. 강북이되 한강가, 동부 이촌동이라 부르는 곳. 강남까지 건너 뛸 만한 힘이 모자랐군, 하고 주변에서 빈정거렸소. 못 들은 척했소. 사실이니까. 오도 가도 못하고 18년째 살고 있소. 살다 보니 못 볼 것도 많이 보았고 볼 것도 많이 보았소. 못 볼 것을 보았을 땐 한강가 산책에 나섰고, 볼 것을 보았을 때도 한강가 산책에 나섰소.

못 볼 것도 없고, 볼 것도 없을 때는 어떠했을까. 지금부터 이에 대해 말해보고자 붓을 들었소. 못 볼 것도, 볼 것도 없을 때 길은 거의 직선이었소. 하늘은 또 어떠했던가. 구름 한 점 없는 그런 하늘이었소. 그 하늘엔 으레 비행기가 장난감처럼 지나가곤 했소. 요컨대 하늘이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하늘만 크게 보였을 이치가 없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소. 고희를 코앞에 둔 어느 날, 땅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지 않겠는가. 땅이라니? 길이란 원래 땅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단순명료한 사실이 이제야 드러나다니! 고희 때문일까.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내겐 없소. 공자께선 60에 귀가 순하다(耳順)고 했으나 내 귀는 조금도 순하지 않았소. 70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럴 자신이 내겐 없소. 그렇다면 공자께선 나를 속였는가. 그럴 이치가 없소. 잘못은 내게 있었을 터, 30에 우뚝 선다(三十而立)고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고 50에 천명도 몰랐으니까.

땅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함이란 그러니까 공자와 무관한 일. 땅이 보이기 시작했음이란 단지 허리가 굽고 힘이 빠져 땅 쪽으로 가까이 갔음에 지나지 않는 것. 땅 쪽으로 가까이 가자 거기엔 하늘과 맞먹는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겠는가. 이른바 한강 둔치.

그 둔치에 어느새 버들개지도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소. 새들이 쉬며 지저귀곤 했소. 여기저기 거리를 두고 뿌리내린 나무들 위로 황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소. 그런데 유독 어떤 나무에 황금빛 황혼이 모여 있지 않겠는가. 가까이 가보니 뽕나무였소. 아, 뽕나무. 병아리 어미 찾아 마당가를 뱅뱅 돌 때 소년은 누나를 따라 뽕을 따러 갔소. 누나가 뽕을 따서 집으로 돌아가면 소나기 삼형제가 차례로 지나가오. 소년은 혼자 남아 쌍무지개 뜨기를 기다리곤 했소. 행여 선녀들 머리 감으러 올까봐서요.

날마다 나는 이 뽕나무 앞을 지났소. 밤새 안녕하신가 하고 물으면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풍우에 부러진 가지를 향해 아픈가 하면 그가 가만히 미소짓곤 했소. 4월이면 엷은 황록색 꽃이 이삭 모양으로 피고 5월이면 검은 자줏빛 열매가 익소. 오디라 부르는 것. 달기가 이를 데 없소. 소년도 새도 함께 달겨드오. 봄이면 잎이 돋소. 잎은 어긋나게 나며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 잎의 가에는 톱니가 있소. 누에에게 먹이는 뽕이오. 오디를 모조리 남에게 주어버린 뽕나무는 무성한 잎을 하늘가에 펼쳤소.

한여름 어느 날인가 뽕잎은 서서히 그 짙은 녹색을 잃고 얼마 안 가 가뭇없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뽕나무 가지를 나방의 벌레떼가 모조리 갉아먹었던 것. 헐벗은 뽕나무. 땡볕 아래 아랫도리까지 벗긴 꼴이라고나 할까. 얼마나 아팠을까. 또 부끄러웠을까. 민망해서 피해갈 수밖에요. 가을이 왔소. 놀라워라. 가지만 남은 나무에서 일제히 새순이 돋아나지 않겠는가. 진짜 새순 말이오. 뽕나무 가지 나방이 깡그리 사라진 세계. 이번의 새잎은 단연 뽕나무 저만의 것이었소. 태양을 받아 겨울을 날 힘을 마련하고 있음이 분명했소.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오디를 주었고, 아낌없이 모든 잎을 벌레에게 주었소. 이제야 자기를 위한 잎의 펼침이었던 것.

눈 속에 뽕나무가 혼자 서 있었소. 견딜 만하오, 라고 물으면 그가 고개를 끄덕였소. 그때 가지에 얹힌 눈이 목소리인 듯 떨어졌소. 하늘은 깨질 듯한 유리창이었고 그 속을 철새 울음이 가로질렀소. 뽕나무의 사계가 거기 있었소.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 않으리, 라고 시인 아닌 나는 시인의 흉내를 내었소.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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