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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4 17:25 수정 : 2005.02.04 17:25

우리 문인, 우리 독립선언서

나라와 겨레가 함께 빛을 잃었던 시대, 그 빛을 찾기 위해 우리 조부님들은 찬바람을 먹으며 들녘에서 잤고, 때로는 목숨 버리기도 서슴지 않았소. 이러한 마음의 흐름을 일러 민족 독립운동이라 하오. 대외에다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운동인지라, 이를 문자로써 조직화하는 일이 불가피했소. 이러한 선언서 중 뚜렷한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소.

머리에 오는 것이 만주 지역 독립군 신채호 등 39인으로 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 두 번째로는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 셋째로는 기미독립선언서. 저 독립군의 외침을 보시라. “정의는 무적의 부(缶 + 刀, 칼자루)이므로 차로써 역천(逆天)의 마(魔)와 도국(盜國)의 적을 일수도결(一手屠決)하라”라고. 한치의 타협도 없는 결의, 유혈의 투쟁이 있을 뿐임을 선언했소.

2·8독립선언서를 보시라. 세세한 세계정세와 외교노선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다음 “자(玆)에 오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여(與)하기를 요구하며, 불연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써,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이에 선언하노라” 했소. 이에 결의문 4항이 붙어 있소. 재일본 동경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최팔용 이하 11명의 명단이 1919년 2월 8일자로 함께 적혀 있소.

우리 모두가 외다시피 한 저 유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다시 보시라.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첫줄을 삼았소. 잇달아 놀라운 목소리도 들려오오.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하려 아니하노라”라고. 어째서? 그럴 틈이 없으니까. “일본의 소의(小義)를 책하려 하니 하노라”라고. 어째서? 현재의 일이 시급하니까. 또 있소. “착수가 곧 성공이라”라는 대목.

독립선언서란 새삼 무엇이뇨. 대외를 향한 일방적 선언을 가리킴인 것. 그러기에 대한독립선언서의 저 절체절명의 투쟁론, 2·8독립선언서의 논리성, 기미독립선언서의 저러한 윤리성도 그 최대한의 표현성을 확보할 수 있었소. 민족 독립운동에 어찌 성패를 문제삼을까 보냐. 그러기에 어떤 논리성, 어떤 윤리성도 결국은 절체절명에로 수렴되는 것. 독립선언서의 수사학을 문제삼지 않는 까닭이 이에서 말미암소. 그럼에도 어째서 유독 이런 글을 문사들이 맡아 써야 했을까. 이제 이 물음을 비켜가기 어려운 마당에 이르렀소. 어째서 대한독립선언서는 <을지문덕>(1908)의 작가 신채호가 관여했고, <무정>(1917)의 작가 이광수가 2·8독립선언서를 써야 했고,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의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써야 했을까. 이 물음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소. ‘한국근대문학사’ 속에 그 해답의 태반이 스며 있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오. 굳이 또 하나의 독립선언서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까닭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소.

“지금에 오인(吾人)은 입만으로의 감언에 만착(瞞着) 되기에는 너무나 자기를 지나치게 갖고 있다. 폭수를 두려워 차에 복종함에는 너무나 자유의 존엄성을 자나치게 깨달았다. 주저할 바 있으랴. 즉 차일명(此一命)을 도(賭)하여, 써, 독립을 선언하는 소이이다.”(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Ⅲ)>)


이 글의 필자는 ‘재 오사카 한국노동자일동대표 염상섭.’ 때는 1919년 3월 19일.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염상섭 이하 24명이 검거되었고(<오사카 아사히신문>, 1919. 3. 21~23) ‘괴수 염상섭’의 재판 장면도 이틀씩이나 보도된 바 있었소. 교토 제16사단 육군 중위의 친아우이며 명문 교토 제2부립중학을 정규로 나온 염상섭의 저러한 선언서는 또 무엇일까. 어째서 그는 노동자의 독립선언서를 써야 했을까. 3개월 후 유치장에서 나온 염상섭은 <동아일보> 창간기자로 활약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의 논객으로도 붓을 놀렸소. 이러한 심파다이저(동조자)의 사상이 걸작 <삼대>(1931)의 밑그림으로 깔려 있소.

‘한국근대문학’이란 새삼 무엇이뇨. 독립선언서에 내속(內屬)됨을 제1명제로 하는 그 무엇이라 하면 어떠할까. 그렇게 믿으며 살아온 세대도 있었소. 식민지사관(이식문학론)의 극복 그것의 별칭이 서투르게나마 내가 해온 ‘한국근대문학’이었소. 내가 해온 인문학은 어리석었을까. 말 탄 자여, 지나가라.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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