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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3 05:59 수정 : 2019.12.13 18:53

[책&생각]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17) 뉘른베르크의 ‘리히트돔’

1차대전 이후 절망한 독일인들에게 승리의 서사로 선동
히틀러의 파시즘, 극적인 무대 연출로 상식을 전복하다

1936년 독일 국가사회주의당 당대회가 열린 뉘른베르크의 리히트돔(Lichtdom).

빛은 진리의 메타포이다. 그래서 빛은 신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빛의 반대물인 어둠은 거짓과 악의 메타포로서 신화와 철학에 등장한다.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신에게 반기를 들어 천국에서 쫓겨난 사탄과 타락천사들이 머물게 되는 지옥이 그런 곳이다.

영원한 정의이신 하나님이 저 반역의 일당들을 위해 그런 곳을 마련하셨으니, 완전한 흑암 속에 그들의 감옥을 정하시고, 하나님과 천국의 빛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 곧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극점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보다 세 배나 먼 이곳을 그들의 거처로 정하셨다.(존 밀턴, 실낙원)

바로 ‘이곳’. 사탄과 타락천사들이 내던져진 곳은 “적막하고 황량하며 음산한 벌판, 푸르스름한 화염들이 타오르면서 새어나오는 창백하고 스산한 미광 외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폐허의 땅”이다. 바로 이 땅에서 사탄과 그를 추종하던 타락천사들은 열패감과 절망감, 신에 대한 질투에 불타 복수를 맹세한다. 스스로 완전한 선으로서의 신에 대한 반대물, 악을 행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는 존재가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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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박된 자들의 해방이라는 나치의 서사

빛의 땅으로부터 암흑의 심연으로의 추방, 패배한 존재들의 승리한 존재에 대한 복수라는 서사는 실낙원에만 있는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서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겪은 여러 독일인들에게 정치를 이해하는 기본 구도가 되었다. 그 한 증거는 1924년 제작된 독일 국가사회주의당, 곧 나치의 선전 포스터이다.

그림은 사슬을 끊고 태양을 향해 비상을 시작한 독수리 한 마리를 보여준다. 태양에는 나치의 꺾쇠십자(하켄크로이츠) 문양이 그려져 있다. 해석은 어렵지 않다. 독수리는 로마제국 이래 황제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이 포스터에서 독수리는 독일을 의미한다. 고대의 로마제국은 무너졌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인들은 그 전통이 962년부터 1806년까지 존재한 신성로마제국(제1제국),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통일독일제국(제2제국)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여겼다.(그리고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세번째 제국, 곧 제3제국을 건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위산의 사슬을 끊고 솟아오르려 하는 독수리는 잘 알려져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준 탓에 바위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매일 물어뜯기는 형벌을 받는다. 포스터에서 사슬을 자르고 비상하는 독수리는 부당한 탄압과 속박을 벗어던지는 독일을 의미한다. 포스터에 쓰인 글자(Deutschlands Befreiung)는 독일의 해방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속박이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을 의미한다. 이 조약을 통해 독일은 상당한 영토를 상실한 데 더하여 사실상 기본적인 자위권을 벗어난 이상의 군사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 포스터가 그려진 1924년 바로 전해에 나치에 의한 뮌헨 봉기가 있었다. 봉기는 실패였으며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검거와 투옥이 따랐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을 독일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속박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투쟁을 선으로 바라본 이들은 나치만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수의 극우 보수 ‘논객들’은 독일이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 같은 내부 반역자들의 음모와 노골적 배신 행위 때문에 패배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을 무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모든 가능한 매체를 통해 퍼뜨렸다.

1924년 독일 국가사회주의당 선전 포스터.

1924년의 포스터는 이러한 그리스(희랍)신화의 서사를 빛과 어둠의 대립이라는 구도 위에 놓았다. 여기서 나치는 태양과 동일한 것으로 그려진다. 나치는 빛이며, 진리이고 절대선이다. 독일 민족의 미래는 나치의 지도를 따르는 데 달려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독수리가 묶인 바위산은 어두움과 혼란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전쟁에 패하고 쉼 없이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괴감에 빠진 많은 독일인들에게 세상은 그런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포스터는 속삭인다. “나치와 그 지도자 히틀러를 따라야 한다. 그래야 이러한 절망적이고 말도 안 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날 되돌아본다면 나치를 절대선으로서, 그에 대한 추종을 진리로의 귀의로 바라보는 것은 “상식의 전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치와 그 추종자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은 의심의 여지 없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 역시 그들의 주장을 완전한 난센스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회에 스며든 증오와 복수심은 독일인들을 극단적 이론과 선동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정과 대공황의 혼란은 그러한 선동에 맞서던 사람들의 설 자리를 앗아갔다. 1933년 나치가 집권했다. 유럽에 지옥문이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와 그 비참함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나치와 그 추종자들은 20세기에 현현한 실낙원의 사탄과 타락천사들처럼 보인다. 악마라는 단어는 전쟁의 광기를 되돌아보며 독일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느낀 바이기도 하였다. 합리적 판단에 의해 제어되지 않은 절망과 증오와 복수심은 손쉽고도 어이없게 인간을 살아 있는 악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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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의 도구가 된 빛과 어둠의 대비

나치는 빛의 메타포를 프로파간다의 단골 소재로 등장시켰다. 1933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에서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연출된 ‘리히트돔’(Lichtdom), 번역하여 ‘빛의 성당’은 그 극한의 예이다. 여기서 슈페어는 152개의 방공 서치라이트를 12m 간격으로 행사장을 둘러 배치하여 밤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빛을 쏘아 올렸다. 리히트돔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신비한 공간 한가운데 있는 듯한 황홀감에 휩싸였으며, 밖에서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초월적인 어떠한 존재나 힘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경외감에 빠져들었다. 이후로도 수년간 나치당 대회의 하이라이트가 된 이 퍼포먼스는 (그 내용의 위험함을 옆으로 밀어둔다면) 20세기 가장 인상적인 정치선동 예술의 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

리히트돔은 인간들의 세계를 빛과 어둠이라는 두 영역으로 뚜렷하게 나눈다. 여기에 성서의 서사가 결합한다. 성서는 그 두 영역의 분열이 한시적이며 비정상적이고, 결국은 빛이 어둠을 정복함으로써만 끝날 것이라고 가르친다. 묵시록은 최후의 심판의 날, 악에 대한 최종적인 징벌과 어둠의 완전한 소멸을 예언한다. 그리하여 리히트돔은 단순한 만큼 위험한 이분법적-투쟁적 세계관을 인간의 의식에 각인한다. 리히트돔은 상징의 언어를 통해 그 안에 선 인간들로 하여금 어둠에 대항한 빛의 투쟁이라는, 우주적 성전에 참여한 십자군이라는 사명감을 가지도록 부추긴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대결이라는 소재가 나치즘의 전유물은 당연히 아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귀에 익은 명제 역시 정치에 대한 생각이 신화와 종교의 언어와 사고에 침윤되어 있던 과거가 남긴 유산이다.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나치 프로파간다의 예에서 보이듯 상징의 언어는 때로 폭발적인 힘을 갖는다. 그 안에 담긴 비범한 호소력 때문이다. 그 호소력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논하려면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그러한 상징의 언어를 정치의 언어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는 그러한 추방이 가능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그러한 영향력 때문에 정치적 상징의 사용에는 책임이 따른다. 더불어 그러한 상징의 언어를 읽어내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메타포에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공동체를 파멸의 심연으로 끌고 갈 힘이 있다.

다음 글은 14세기 영국으로 돌아간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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