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선정 2019 올해의 북디자인]
쉽고 자극적인 책들이 대세인 출판 시장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하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지라도 끝끝내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과 작품들
[선정작과 심사평]
아네모네-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
전용완 디자인, 성동혁 지음/봄날의책
123X205㎜, 106쪽, 1만1000원 건반 위의 철학자-사르트르, 니체, 바르트
나종위 디자인, 프랑수아 누델만 지음, 이미연 옮김/시간의흐름
127X193㎜, 232쪽, 1만8000원
공간의 종류들-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최성민 디자인,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문학동네
153X224㎜, 184쪽, 1만5000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합본 특별판)
민음사 미술부 디자인(황일선),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민음사
152X231㎜, 1460쪽, 3만5000원 죽음 1, 2
함지은 디자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열린책들
128X198㎜, 328쪽, 각권 1만4000원 신참자 (교보문고 리커버 한정판)
오필민 디자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135X198㎜, 440쪽, 1만4800원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
박연주 디자인, 정희승 사진, 김성우 글/헤적프레스
210X325㎜, 144쪽, 4만5000원 한국의 90년대 전시 도록 xyz
권민선, 유예나, 원야위엔, 전가경 디자인·지음/파티(PaTI)
134X210㎜, 424쪽, 2만5000원 김형진 워크룸프레스 공동대표 작가 초상으로 표지를 꾸미는 건 불리한 싸움을 거는 짓이다. 커트 보네거트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나 존 버거처럼 영화배우처럼 생긴 얼굴은 표지에 올라가는 순간 공간을 다 잡아먹어 버린다. 디자인할 여지가 사라져버리는 거다. 조르주 페렉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 굳이 따지자면 커트 보네거트 계열로 생긴 이 작가의 초상으로 의욕적인 ‘디자인’을 하기란 쉽지 않다 .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에서 슬기와민은 이 불리한 싸움을 여섯 번째 수행하면서 단 한번도 지루한 실패를 하지 않았다. 시리즈 중 가장 추상도가 높게 변형되었지만 은은하게 미소짓는 페렉의 입꼬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의 책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가 마주해야 하는 건 그 작가와 작품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이 작가와 작품을 다뤘던 수많은 다른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 옹송거리고 앉아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하고 디자이너의 모니터를 째려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스토예프스키 특별판, <카라마조프 > 특별판이 있었단 말인가. 올해 민음사에서 새로 펴낸 합본 특별판은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함축적이며 밀도 높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단검마냥 공간을 짧게 찔러대는 글꼴도 매력적이다. 이 정도라면 집에 꽂혀 있는 책을 들어내고 새로운 <카라마조프 >를 들일 이유로 충분하다. 박진범 디자이너 2018년 북디자인이 점점 단순화된 이미지와 타이포들을 실험하는 한해였다면 2019년은 이런 방식들이 더욱 디테일해지고 세분화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힘들지 않게 절제한 타이포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대범하게 남겨둔 여백이 주는 감각적인 디자인들로 눈이 즐거웠던 한해였다. 반면 이런한 디자인들이 시장을 이끌기 시작하자 무작정 시류를 타고 쫓기 바빠서인지 비슷비슷한 디자인들이 속출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해서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해이기도 하다 . 이런 상황에서도 시장의 흐름에 관계없이 꿋꿋히 타이포를 디자이너가 재해석하고 이미지화해서 즐거움을 주는 책들이 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죽음>은 표지 정면에 해골을 문양처럼 표현하여 죽음이란 제목과 연결시켰다. 같은 색감이었으면 보이지 않았을 해골문양을 배경엔 무채색으로 해골문양은 컬러에폭시를 사용하여 분리시켜 완성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가 미로를 연상시켜서 소설 속 주인공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내용을 과하지 않게 암시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또한 이 책의 재미있는 점 한 가지는 한정 에디션 판에서는 해골의 일정부분에 야광잉크를 사용해 해골문양 안에서 백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디자인은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디자이너가 책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절대 만들어 질 수가 없다. 디자이너의 텍스트 해석력과 치밀한 계산력 그리고 과하지 않게 적절히 표현한 이미지로 탄생한 무겁지 않은 (?) ‘죽음’은 올해의 북디자인으로 손색이 없다. 재인에서 나온 히가시노게이고의 <신참자>는 교보문고 특별 리커버 판이다. 리커버 판은 1, 2년 전부터 인터넷 서점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데 기존의 도서를 한정 생산하는 방식이다. <신참자>는 하드커버 제본에 눈동자 부분을 타공하여 눈동자 안의 이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표지를 넘기면 소위 면지라고 말하는 부분을 전통과자나 민속 공예품의 소품들로 꾸며 이 소설의 배경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즉, 주인공의 눈에 비추어진 소설속 사건의 배경과 이야기들을 굉장히 함축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해 냈다. 또한 책장부분의 단면을 붉은색으로 인쇄하여 책의 디테일을 한껏 살려냈다. 서점 매대에서 수많은 책들 속에서 그 위용을 뽐내던 감동이 책을 볼때마다 다가온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장은 죽지 않았다. 안지미 알마 대표 쉽고 자극적인 책들이 대세인 출판 시장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하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 지라도 끝끝내 정성을 다하는 이들이있다. 두 권의 책은 나에게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아네모네> 표지에 사용된 김현정 작가의 목탄연작과는 특별한 인연이있는데 김현정 작가의 목탄 그림들에 반해 책에 담아내고 싶어서 기획된 책이 바로 알마에서 펴낸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아네모네>에 표지화는 목탄 시리즈 중에서 ‘파도 ’라는 작품인데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에는 본문 그림으로 녹여졌다. 같은 그림이지만 텍스트의 힘이 더해져 내게 전혀 다른 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아네모네>표지에서 제목을 과감하게 삭제해버리고 넘실대는 파도의 힘찬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아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건반 위의 철학자>는 올해 내가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만듦새의 정성에 감동한 책이다. 지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단은 천으로 싸고 하단은 종이로 싸는 독특한 제본으로 촉감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렇게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한 책이라니 인간의 삶에서 책이 점점 더 멀어지는 시대에 끝까지 남아서 책을 만드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순간순간 정성을 다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더 없이 소중하다. 정재완 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한 해 동안 출간된 책들을 모두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다 .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다. 다만 사진책을 출판하면서 느껴지는 흐름을 감지하는 정도로 간단한 글을 적는다. 사진책은 말 그대로 사진 +책의 결과물이다. 사진 작가의 작품 원본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는 책도 있고, 사진이 책의 재료로 다뤄지며 기획과 편집, 디자인이 보다 드러나는 책도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후자의 책들이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최근의 현상이 흥미롭다. 사진책의 저자가 사진작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사진책의 디자이너가 누구인가에 따라 책의 존재감이 달라지는 것을 목격할 때, 북 디자인의 힘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헤적프레스에서 출판한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진가 정희승의 작품을 충실하게 담아낸 사진책이자 디자이너 박연주의 역할이 돋보이는 사진책이다. 본문 사진의 선정과 배열이 작가의 의도인지 디자이너의 의도인지 잘 모르겠으나, 전자라면 뛰어난 협업의 성과이고 후자라면 디자이너의 편집과 해석이 뛰어난 작업이 되는 것이다. 책 판형이 특별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본문에 놓인 사진의 포맷을 특별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함은 디자이너 박연주의 위트로 보인다. 과하지 않으면서 한번 비틀어주는 ‘건조한 위트’는 평소 그의 디자인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폐허로 보이는 옛 국군광주병원이 사색적이고 그래픽적인 장면으로 연출된 것 또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사진들은 둘 사이를 자꾸 들춰보게 만드는데, 나는 어떤 답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궁금해하는 중이다. 프레임에 가둔 사진과 블리딩한 (지면 밖으로 잘린) 사진이 주는 편집의 호흡도 고급스럽다. 무엇보다 얇은 표지를 감싼 클로스 (천)가 만들어내는 촉감은 거친 장소와 연결되는 기분이다. 결국 북 디자인은 한 장으로서의 사진 작품이 아닌 한 권으로서의 책이 주는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대중 독자들이 이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기란 여간 수월치 않다. 소규모 출판이 부딪히는 유통의 어려움이다. 이런 한계는 소규모 출판사가 극복해 나가야할 현실이다. PaTI(파티. 파주타이포그라피교육 협동조합)에서 출판한 <한국의 90년대 전시 도록 xyz>는 제목 그대로 전시 도록을 수집하고 기록한 책이다. 책은 미술과 디자인이 협업했던 90년대 문화 현장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줌으로써 2000년대 이후 그래픽 디자인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춰져 있던 90년대 그래픽 디자인의 활약상을 드러낸 기획이다. 책에 실린 사진은 전시 도록의 표지와 내지를 촬영한 것이다. 책 배면의 그라데이션은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연출이다. 겉표지는 연표를 접어서 만들었다. 정치, 사회, 문화, 미술, 시각디자인의 주요 사건이 메모되어 있는 표지 연표는 본문에서 다뤄지는 전시 도록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압축된 정보그래픽이다. 책의 선형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차례와 인덱스의 구조는 책에서 언제나 훌륭한 장치로 기능한다. 나무와 숲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서 방식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갖는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학교 수업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상식이 되어버린 말이지만, 팔리지 않는 책도 기획하고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요즘이다. 만들고 싶으면 만든다. 만들어야 하는 책이라면 만든다. 기존 상업출판이 갖는 노련함과 능청스러움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게 한땀 한땀 공을 들이고 집중한다. 많은 대학에서 젊은 학생들은 의미있는 책을 출판하는 중이다. 설령 미완에 그치는 작업이 있더라도 기획과 디자인의 진취적인 모습은 충분히 주목할 점이다.
전용완 디자인, 성동혁 지음/봄날의책
123X205㎜, 106쪽, 1만1000원 건반 위의 철학자-사르트르, 니체, 바르트
나종위 디자인, 프랑수아 누델만 지음, 이미연 옮김/시간의흐름
127X193㎜, 232쪽, 1만8000원
공간의 종류들-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최성민 디자인,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문학동네
153X224㎜, 184쪽, 1만5000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합본 특별판)
민음사 미술부 디자인(황일선),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민음사
152X231㎜, 1460쪽, 3만5000원 죽음 1, 2
함지은 디자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열린책들
128X198㎜, 328쪽, 각권 1만4000원 신참자 (교보문고 리커버 한정판)
오필민 디자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135X198㎜, 440쪽, 1만4800원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
박연주 디자인, 정희승 사진, 김성우 글/헤적프레스
210X325㎜, 144쪽, 4만5000원 한국의 90년대 전시 도록 xyz
권민선, 유예나, 원야위엔, 전가경 디자인·지음/파티(PaTI)
134X210㎜, 424쪽, 2만5000원 김형진 워크룸프레스 공동대표 작가 초상으로 표지를 꾸미는 건 불리한 싸움을 거는 짓이다. 커트 보네거트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나 존 버거처럼 영화배우처럼 생긴 얼굴은 표지에 올라가는 순간 공간을 다 잡아먹어 버린다. 디자인할 여지가 사라져버리는 거다. 조르주 페렉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 굳이 따지자면 커트 보네거트 계열로 생긴 이 작가의 초상으로 의욕적인 ‘디자인’을 하기란 쉽지 않다 .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에서 슬기와민은 이 불리한 싸움을 여섯 번째 수행하면서 단 한번도 지루한 실패를 하지 않았다. 시리즈 중 가장 추상도가 높게 변형되었지만 은은하게 미소짓는 페렉의 입꼬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의 책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가 마주해야 하는 건 그 작가와 작품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이 작가와 작품을 다뤘던 수많은 다른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 옹송거리고 앉아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하고 디자이너의 모니터를 째려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스토예프스키 특별판, <카라마조프 > 특별판이 있었단 말인가. 올해 민음사에서 새로 펴낸 합본 특별판은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함축적이며 밀도 높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단검마냥 공간을 짧게 찔러대는 글꼴도 매력적이다. 이 정도라면 집에 꽂혀 있는 책을 들어내고 새로운 <카라마조프 >를 들일 이유로 충분하다. 박진범 디자이너 2018년 북디자인이 점점 단순화된 이미지와 타이포들을 실험하는 한해였다면 2019년은 이런 방식들이 더욱 디테일해지고 세분화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힘들지 않게 절제한 타이포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대범하게 남겨둔 여백이 주는 감각적인 디자인들로 눈이 즐거웠던 한해였다. 반면 이런한 디자인들이 시장을 이끌기 시작하자 무작정 시류를 타고 쫓기 바빠서인지 비슷비슷한 디자인들이 속출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해서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해이기도 하다 . 이런 상황에서도 시장의 흐름에 관계없이 꿋꿋히 타이포를 디자이너가 재해석하고 이미지화해서 즐거움을 주는 책들이 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죽음>은 표지 정면에 해골을 문양처럼 표현하여 죽음이란 제목과 연결시켰다. 같은 색감이었으면 보이지 않았을 해골문양을 배경엔 무채색으로 해골문양은 컬러에폭시를 사용하여 분리시켜 완성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가 미로를 연상시켜서 소설 속 주인공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내용을 과하지 않게 암시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또한 이 책의 재미있는 점 한 가지는 한정 에디션 판에서는 해골의 일정부분에 야광잉크를 사용해 해골문양 안에서 백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디자인은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디자이너가 책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절대 만들어 질 수가 없다. 디자이너의 텍스트 해석력과 치밀한 계산력 그리고 과하지 않게 적절히 표현한 이미지로 탄생한 무겁지 않은 (?) ‘죽음’은 올해의 북디자인으로 손색이 없다. 재인에서 나온 히가시노게이고의 <신참자>는 교보문고 특별 리커버 판이다. 리커버 판은 1, 2년 전부터 인터넷 서점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데 기존의 도서를 한정 생산하는 방식이다. <신참자>는 하드커버 제본에 눈동자 부분을 타공하여 눈동자 안의 이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표지를 넘기면 소위 면지라고 말하는 부분을 전통과자나 민속 공예품의 소품들로 꾸며 이 소설의 배경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즉, 주인공의 눈에 비추어진 소설속 사건의 배경과 이야기들을 굉장히 함축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해 냈다. 또한 책장부분의 단면을 붉은색으로 인쇄하여 책의 디테일을 한껏 살려냈다. 서점 매대에서 수많은 책들 속에서 그 위용을 뽐내던 감동이 책을 볼때마다 다가온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장은 죽지 않았다. 안지미 알마 대표 쉽고 자극적인 책들이 대세인 출판 시장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하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 지라도 끝끝내 정성을 다하는 이들이있다. 두 권의 책은 나에게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아네모네> 표지에 사용된 김현정 작가의 목탄연작과는 특별한 인연이있는데 김현정 작가의 목탄 그림들에 반해 책에 담아내고 싶어서 기획된 책이 바로 알마에서 펴낸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아네모네>에 표지화는 목탄 시리즈 중에서 ‘파도 ’라는 작품인데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에는 본문 그림으로 녹여졌다. 같은 그림이지만 텍스트의 힘이 더해져 내게 전혀 다른 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아네모네>표지에서 제목을 과감하게 삭제해버리고 넘실대는 파도의 힘찬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아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건반 위의 철학자>는 올해 내가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만듦새의 정성에 감동한 책이다. 지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단은 천으로 싸고 하단은 종이로 싸는 독특한 제본으로 촉감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렇게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한 책이라니 인간의 삶에서 책이 점점 더 멀어지는 시대에 끝까지 남아서 책을 만드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순간순간 정성을 다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더 없이 소중하다. 정재완 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한 해 동안 출간된 책들을 모두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다 .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다. 다만 사진책을 출판하면서 느껴지는 흐름을 감지하는 정도로 간단한 글을 적는다. 사진책은 말 그대로 사진 +책의 결과물이다. 사진 작가의 작품 원본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는 책도 있고, 사진이 책의 재료로 다뤄지며 기획과 편집, 디자인이 보다 드러나는 책도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후자의 책들이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최근의 현상이 흥미롭다. 사진책의 저자가 사진작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사진책의 디자이너가 누구인가에 따라 책의 존재감이 달라지는 것을 목격할 때, 북 디자인의 힘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헤적프레스에서 출판한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진가 정희승의 작품을 충실하게 담아낸 사진책이자 디자이너 박연주의 역할이 돋보이는 사진책이다. 본문 사진의 선정과 배열이 작가의 의도인지 디자이너의 의도인지 잘 모르겠으나, 전자라면 뛰어난 협업의 성과이고 후자라면 디자이너의 편집과 해석이 뛰어난 작업이 되는 것이다. 책 판형이 특별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본문에 놓인 사진의 포맷을 특별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함은 디자이너 박연주의 위트로 보인다. 과하지 않으면서 한번 비틀어주는 ‘건조한 위트’는 평소 그의 디자인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폐허로 보이는 옛 국군광주병원이 사색적이고 그래픽적인 장면으로 연출된 것 또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사진들은 둘 사이를 자꾸 들춰보게 만드는데, 나는 어떤 답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궁금해하는 중이다. 프레임에 가둔 사진과 블리딩한 (지면 밖으로 잘린) 사진이 주는 편집의 호흡도 고급스럽다. 무엇보다 얇은 표지를 감싼 클로스 (천)가 만들어내는 촉감은 거친 장소와 연결되는 기분이다. 결국 북 디자인은 한 장으로서의 사진 작품이 아닌 한 권으로서의 책이 주는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대중 독자들이 이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기란 여간 수월치 않다. 소규모 출판이 부딪히는 유통의 어려움이다. 이런 한계는 소규모 출판사가 극복해 나가야할 현실이다. PaTI(파티. 파주타이포그라피교육 협동조합)에서 출판한 <한국의 90년대 전시 도록 xyz>는 제목 그대로 전시 도록을 수집하고 기록한 책이다. 책은 미술과 디자인이 협업했던 90년대 문화 현장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줌으로써 2000년대 이후 그래픽 디자인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춰져 있던 90년대 그래픽 디자인의 활약상을 드러낸 기획이다. 책에 실린 사진은 전시 도록의 표지와 내지를 촬영한 것이다. 책 배면의 그라데이션은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연출이다. 겉표지는 연표를 접어서 만들었다. 정치, 사회, 문화, 미술, 시각디자인의 주요 사건이 메모되어 있는 표지 연표는 본문에서 다뤄지는 전시 도록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압축된 정보그래픽이다. 책의 선형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차례와 인덱스의 구조는 책에서 언제나 훌륭한 장치로 기능한다. 나무와 숲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서 방식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갖는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학교 수업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상식이 되어버린 말이지만, 팔리지 않는 책도 기획하고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요즘이다. 만들고 싶으면 만든다. 만들어야 하는 책이라면 만든다. 기존 상업출판이 갖는 노련함과 능청스러움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게 한땀 한땀 공을 들이고 집중한다. 많은 대학에서 젊은 학생들은 의미있는 책을 출판하는 중이다. 설령 미완에 그치는 작업이 있더라도 기획과 디자인의 진취적인 모습은 충분히 주목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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