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물질적 삶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민음사(2019) 프랑스 동부지방에서 어느 여름날 오후에 일어난 일이다. 한 가족이 폐쇄된 옛 기차역 근처에 살았다. 그 가족은 지능이 좀 모자라는 아내, 잡역부인 남편, 네 살, 한 살 반 아이로 이뤄져 있었다. 그들 집 앞으로 고속철도가 지나갔다. 그들은 전기요금도 수도요금도 낼 수 없었고 몹시 가난했다. 어느 날 수도국 직원이 단수를 통보하러 왔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가고 없었다. 더운 여름 오후 ‘단수하러 온 남자’는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물을 끊었다. 여자에게는 아가를 씻길 물도, 마시게 할 물도 없었다. 그날 저녁 여자와 남편은 두 아이를 데리고 폐쇄된 역 앞을 지나는 고속철도 선로에 누웠다. 부부는 ‘아가야 백미터만 가면 된단다’ 아가를 달래면서 거기까지 갔을 것이다. 부부는 노래를 불러 아이들을 재웠을 것이다. 기차가 멈췄다고 한다. 그들은 함께 죽었다. 수도국 직원은 그녀가 물을 끊지 말아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남자가 단수 조처를 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 뒤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을의 알고 지내는 카페로 갔다. 그녀가 카페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죽을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많은 죽음은 이와 비슷하게 진행된다. 부부는 아이를 하나씩 안고 기차를 기다린다. 단수하러 왔던 남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물질적 삶>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그녀가 지능이 모자라다고 말했지만 그 여자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기 가족을 구해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할 일은 이제 단 하나, 죽는 것뿐이다. 그녀는 끔찍하고 심오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자살에 비추어 볼 때, 누군가 다시 그녀 이야기를 하게 될 때 그녀의 지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지난해 <자살률의 비밀>이라는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받았던 질문이 생각났다. “한국 사람들이 높은 자살률과 연결해 생각 못 하는 오이시디(OECD) 지수가 하나 있어요. 그게 뭘까요?” 대답을 못 했다. ‘신뢰지수’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 그 ‘불신’이 우리의 어둠이고 고독이고 뼈아픈 실패고 절망이고 높은 ‘자살률의 비밀’이다. 그러나 이 슬픈 글에는 내게 앞길을 보여준 뒤라스의 문장이 있다. “바로 거기 수도국 직원이 물을 끊은 순간부터 여자가 카페에서 돌아온 순간까지, 나는 그 사이에 놓인 이야기의 침묵을 되살린다. 그러니까 깊은 침묵의 문학을 되살린다. 바로 그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야기에 파고들도록 한다. (…) 그녀는 그냥 집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이 오면 죽기로 했다고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뒤라스처럼 그녀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마지막 침묵에 그녀의 평생이 담겨있다. 힘없고 가난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거절이 뭔지 알게 되는 것. 기대가 없어지는 것, 포기하다가 침묵하게 되는 것.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찾고 절망적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 한 사람이다. 2020년, ‘이야기의 침묵을 되살린다’, 이 문장이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해주길 원한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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