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0 06:01
수정 : 2019.12.20 20:13
70~80년대 ‘레즈비언 페미니즘’ 형성한 역사적 문헌들 엮은 책
“억압 정당화하는 이성애 사회 시스템 파괴해야 자유 얻을 것”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 반란, 연대, 전복의 현장들
샬럿 번치, 앤 코트, 에이드리엔 리치, 모니크 비티그 지음, 나영 엮고 옮김/현실문화·1만4000원
“여성해방의 근간으로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의 최우선적 과제로, (중략) 모든 사람과 제도를 부자, 백인 남성의 이익을 위해 정의하는 우리 사회에서 레즈비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샬럿 번치의 ‘반란을 일으키는 레즈비언들’의 도입부다. 번치는 여성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문화 속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의미임을 선언한다. 남성이 우월하다고 선언하는 사회에 맞서 여성을 첫 번째로 놓는 일. 레즈비어니즘.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의 현장에서 탄생한 레즈비언 페미니즘 정치학의 고전격인 네 편의 에세이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나왔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 반란, 연대, 전복의 현장들>에 실린 글을 쓴 샬럿 번치, 앤 코트, 에이드리엔 리치, 모니크 비티그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급진적 여성운동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인 김보명이 쓴 추천의 글에 따르면 이 책은 “레즈비언에 대한 혐오정치를 가시화하는 데서 시작해, 레즈비언과 여성의 관점에서 사랑과 결혼, 여성 억압에 관해 사유하는 정치적 이론으로서 페미니즘을 제시한다.” 이 책을 엮고 번역한 나영의 서문은 네 편의 글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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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번치는 여성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문화 속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의미임을 선언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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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은 레즈비어니즘이라는 단어에서 성적 행동의 함의를 가장 먼저(혹은 유일하게) 읽어내는가? 그러한 사고는 여성을 성적으로만 여기는 남성들의 제한된 시선을 반영한다고 샬럿 번치는 주장한다. “레즈비언이란, 자아에 대한 감각과 성적인 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에너지를 여성들에게 집중시키는 여성”임을 강조한다. ‘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등장하는데, 그 뜻은 억압자인 남성의 이해관계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여성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정의하는 여성이다.
앤 코트의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 도입부를 보자.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생활에 실제로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적용할 것을 고려하기 훨씬 이전부터 ‘레즈비언’이라고 불려왔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해방을 위해 정치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그 운동이 커지자 그들에게 직접적인 모욕을 주기 위해 행해진 일이었다.” 남성과 관계 맺고 있는 여성들의 두려움, 그러니까 ‘여자 같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건드리는 위협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남성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스럽지 않은 존재와 독립적인 존재는 연관되어 있다. 2019년 현재에도, 꾸밈부터 출산까지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 ‘여자 같지 않다’(혹은 남자 같다)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레즈비언은 남성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개념과 관련해 코트는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쓰고 있는데, 개인적인 관계에서 남성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많은 중요한 일에서 남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모든 여성들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어떤 여성도 홀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트는, 앞서 번치의 글에 등장하는 ‘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이라는 용어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와 관계를 맺는지에 기반해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여성 개인의 초청이 있을 때만 그녀의 사적인 삶에 개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통된 억압에 근거해 여성들의 연대나 자매애를 묘사하는 용어를 찾는다면, 그 용어는 페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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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엔 리치는 강제적 이성애가 정치적 제도로 인식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진 작가 닐 보엔치(Photo by Neal Bo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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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엔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는 문학과 사회과학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여성에게 강제적 이성애가 요구되는 데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집중한다. 이성애가 정치적 제도로 인식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모니크 비티그는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에서 섹슈얼리티는 여성들에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폭력의 사회제도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썼다. 더불어, 레즈비어니즘이 여성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형태라고,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에 기반하며 성별 간에 차이가 있다는 교조를 생산해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성애라는 사회 시스템을 파괴함으로써만”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강조했다.
이다혜/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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