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2.27 05:00 수정 : 2019.12.27 20:49

백년의 변혁-3·1에서 촛불까지
백낙청 임형택 도진순 외 지음, 백영서 엮음/창비·1만8000원

3·1운동 100주년의 해가 저물어가는 가운데, 2016년 촛불의 눈으로 1919년 3·1을 다시 보는 동시에 3·1의 눈에 비춰 촛불을 다시 보는 ‘겹눈’의 역사관을 강조하는 시각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지난 100년의 과정이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성취”로서 단선적 발전이 아니라 때로는 심각한 중단이나 퇴보도 겪는 굴곡의 역사임을 인식하자는 제안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백년의 변혁-3·1에서 촛불까지>의 서장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서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구세력의 연대행동을 “촛불혁명”에 반대하는 분단기득권 세력의 공세라고 규정했다. 그는 한국의 수구세력이 “공공연한 친일은 대체로 삼가왔는데, 최근의 한·일 경제전쟁에서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일본정부를 두둔하는 행태를 드러낸 것은 어쩌면 초유의 현상일 듯하다”며 “촛불혁명을 빼고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어차피 집권을 하려면 현 정부를 철저히 망가뜨려서 반사이익을 보는 길밖에 없는데 문재인 정부를 상대 않겠다는 일본을 돕지 않고 어쩔 것인가”라며 “문재인 대통령을 혼내주려고 아베가 나섰으니 촛불혁명 반대세력으로서는 천우신조인 셈”이라고 정리했다. 이어 남한과 북한, 미국과 일본의 “분단기득권 세력을 정확히 식별하고 그 책임의 경중을 가리며 국내외 세력들 간의 결탁 양상을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으로 볼 것인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이른바 건국절 논쟁을 일단락했다고 평가받는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의 글 ‘시간(Kairos)과 기억(Memory)-건국 원년, 건국기념일, 연호’도 수정·보완을 거쳐 다시 실렸다. 도 교수는 이 글에서 1919년 건국론을 주도한 것은 한국의 보수가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이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진보는 1919년, 보수는 1948년을 각각 건국 시점으로 주장해 왔는데, 이게 사실 무의미한 논쟁에 불과하다는 지적인 셈이다.

도 교수는 “1919년 건국론은 기나긴 논쟁에서 오해되어온 것처럼 김구와 임시정부가 주도하고 이승만‘마저도’ 그렇게 따라간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승만‘이야말로’ 이 기억의 창시자이자 주도자였다”고 밝혔다. 그 시작은 1948년 5·10선거를 주도한 뒤 5월31일 국회의장으로서 발표한 국회 개회 식사(式辭)였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이 식사에서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려는 것”이라며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이라고 밝혔다. 연호도 “기미년(1919)에서 기산”하는 “민국 연호”를 강조하고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했다. 해방 이후 복간된 신문과 잡지들이 대거 단기(檀紀)를 사용했고, 미군정도 호적을 단기로 교체하는 등 단기 연호가 보편적이었지만, 이승만은 1919년 기원의 민국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만들어진 제헌헌법 ‘전문’은 1919년 건국론에 입각해 있지만 연호는 1919년의 민국 연호가 아닌 단기를 사용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단기가 아닌 ‘대한민국 30년’이라는 민국 연호를 사용하는 등 혼선이 거듭됐다. 대한민국 정부 공보처에서 발간한 <관보> 첫 호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표기했고, 김병로 대법원장은 서기 연호를 사용했다. 행정부는 민국 연호, 입법부는 단기, 사법부 수장은 서기를 사용해 어떤 식으로든 연호 통일이 필요했다. 이 논란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단기 연호를 본회의에 제출해 압도적인 표 차로 통과되면서 끝났다. 도 교수는 이승만이 민국 연호를 선호한 이유를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1948년의 대한민국은 1919년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며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단독정부가 아니라 중앙정부이며, 북은 남의 국회 안에 그 일부로서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정리한다.

도 교수는 “1919년 건국론은 역사나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승만이 주도한 특별한 기억·기념의 방식이었다”며 “이제 우리의 역사 기억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기존의 친일과 반일, 우익과 좌익, 남과 북의 대립 구조로는 지나간 역사도 반쪽의 기억이 되기 쉬우며, 다가오는 역사적 대변화를 감당하기도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재성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