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⑩ 내 안의 두려움과 맞서게 하는 문학의 힘
스스로를 학대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믿지 못할 때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떨어지지 않게 우리를 붙잡는 존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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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판 <호밀밭의 파수꾼>의 표지 전체를 펼친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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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어린 시절의 불안을 고스란히 간직한 소년을 만난 것 같아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성별은 다르지만,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지독한 까칠함이 딱 나였다. 한없이 불안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품성을 지닌 아이, 사랑이 가득하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홀든. 오직 규칙과 단체생활만이 중요한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홀든. 그는 어디서나 뼈아픈 외로움을 느낀다. 이 세상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동생 앨리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심각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홀든의 주변엔 그의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이 없다. 부모 또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우울에 빠진 상태고, 선생님이나 친구 중에서도 홀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 번번이 낙제를 당하고 학교 기숙사에서까지 도망친 홀든은 학교도 집도 싫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홀든은 그저 말이 통하는 사람과 전화 한 통이라도 하고 싶지만, 홀든의 첫사랑 제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도대체 이 아이가 무슨 사고를 치려나’ 싶어 불안했다. 내 코가 석 자임에도, 이 친구가 커서 뭐가 되려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홀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홀든은 나였다. 내가 무엇이 되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그저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홀든과 나에게 절실했던 것은, 가르침을 주는 거창한 조언이 아니라 그저 따스한 안부의 메시지였다. 기숙사에서 뛰쳐나온 홀든에게 어른들은 걸핏하면 나이를 묻는다. 호텔에서도 택시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어른들은 묻는다. 도대체 몇 살이니. 미성년자임이 분명한,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을 굴리는 아이가 뉴욕의 한복판을 혼자 헤매고 있으니 의심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때 단 한 사람이라도 홀든에게 나이가 아닌 안부를 물어주었더라면. 홀든은 세상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방황하던 홀든에게 ‘몇 살이냐’를 묻지 않고, ‘괜찮니’, ‘밥은 먹었니’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면, 홀든은 그토록 외로운 시간을 오직 절망에 빠져서 헤매지 않았을 텐데.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나의 외로움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 함께, 이제 어른이 된 우리가 닦아주어야 할 이 세상 수많은 아이들의 눈물을 생각하게 만든다.
호밀밭의 파수꾼, 문학
문학작품 속의 문제적 개인은 단순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다. 홀든은 단지 분란을 일으키는 말썽꾸러기 소년이 아니다. 홀든의 방황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홀든의 가족처럼, 자식이 영혼의 심장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도 부모가 아무런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가족이 잘못되었다는 것. 학생의 시험점수만 중요할 뿐 학생의 진짜 안부는 묻지 않는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 아이들의 행복이 아니라 아이들의 통제만이 중요한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홀든은 온몸이 거대한 물음표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향해 꽂히는 보이지 않는 화살 같은 존재다.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어른들의 편견과 아집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해맑은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전에 우선 그의 나이나 학벌 따위를 훑어보는 이 세상의 속물적 판단을 향해. 홀든은 온몸으로 물음표를 그리며 우리의 심장을 할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홀든이 어디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이 아이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도, 학교도, 사회도, 아이들의 방황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단지 한 사람의 안부를 묻는 누군가의 따스한 눈빛이 필요했던 홀든의 뼈아픈 외로움을 이젠 알 것 같다. 다행히 홀든에게는 그의 순수한 안부를 물어줄 단 한 사람의 멘토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여동생 피비였다. 마침내 퇴학을 당한 홀든이 영원히 부모님 곁을 떠나겠다고 결심하고 피비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자, 피비는 이러다가 오빠가 아빠에게 맞아 죽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피비는 도대체 오빠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 홀든의 성적이나 위치가 아니라 홀든의 꿈을 물어보는 사람은 피비뿐이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 여린 홀든이 걱정되지만, 홀든이 나의 걱정을 탁 내려놓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나는 그 순간, 홀든이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네가 나보다 훨씬 성숙한 존재인데, 내가 너를 주제넘게 걱정했구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마음속 밤하늘에서 무지갯빛 불꽃놀이 화약이 펑펑 터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홀든의 꿈이기도 하지만 문학의 영원한 이상이기도 하다. 절벽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아무 말 없이 꼭 붙들어주는 것. 그곳이 절벽인지도 모른 채 마구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것. ‘읽는 수고’만 거부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는 우리를 붙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추락하는 이들을 떠받치는 존재
삶의 희망을 놓고 싶을 때, 이제 그만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대를 내려놓고 싶을 때, 문학은 나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주었다. 내가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마다 문학은 내 어깨를 붙잡아주고 내 이마를 짚어주고 내 손을 붙잡아주었다. 문학은 내게 속삭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때로는 죽음보다 삶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삶을 택해야 한다고. 피비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오빠의 소원을 열심히 들어준 뒤, 그동안 소중히 모아온 크리스마스 용돈을 오빠의 손에 쥐여주며 작별인사를 한다. 그 순간 피비가 오빠에게 전해준 용돈은 소녀가 가진 모든 것이었을 터이다. 말썽꾸러기 오빠라도 좋으니, 제발 어디서든 무사히 살아 있기만을 바라는 동생의 마음. 오빠가 퇴학당해도 괜찮으니, 아빠에게 맞아 죽지는 말기를 바라는 동생의 사랑. 홀든은 그제야 동생의 품에 안겨 펑펑 운다. 홀든은 깨닫는다. 불완전한 안식처라도, 비틀거리는 가족이라도, 자신에게는 돌아올 곳이 있음을. 그가 정말로 누구의 월급도 받을 수 없고 명함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 없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더라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문학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내가 스스로를 학대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믿지 못할 때,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속삭였다. 너의 불안과 너의 절망과 너의 증오조차도 사랑한다고. 우리의 그 어처구니없음과 울퉁불퉁함과 대책없음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임을, 문학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문학에는 전혀 실용성이 없다고, ‘문학 하는 사람’이 되면 굶기 십상이라고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피비의 따스함과 홀든의 순수함을 보여드리고 싶다. 문학은 홀든처럼 세상에 이름 붙이기 힘든 꿈을 지닌 사람들을 온몸으로 끌어안는다고. 문학은 피비처럼 세상에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보듬어준다고. 누군가의 절망을 온몸으로 보듬어 희망으로 바꿔내는 힘은, 어떤 화려한 실용성보다도 아름다운 가치니까. 문학은 언제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추락할지 모르는 우리를 온몸으로 떠받쳐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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