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20.01.10 06:00 수정 : 2020.01.10 10:16

긴즈버그의 말: 평등을 향해 걸어온 대법관의 목소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헬레나 헌트 지음, 오현아 옮김/마음산책·1만5500원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우라는 것이다.”

1973년 1월17일, 여군 남편의 피부양자 혜택과 관련한 재판에서 변호사 긴즈버그는 19세기 노예폐지론자이자 여성참정권운동가 세라 그림케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변론했다. 출판사 마음산책의 13번째 ‘말 시리즈’인 <긴즈버그의 말>은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야기다. “목소리 높이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마라.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는 외로운 목소리가 되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라” 같은 멋진 말도 있지만 “계속 노력하면서 자질이 있음을 보여준다면 종국에는 성공할 것이다”처럼 다소 고루한 이야기도 없지 않다. 읽다 보면 이유를 알게 된다. 미국 사회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자 ‘인권의 수호자’ 양쪽 모두 긴즈버그의 진실인 것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2006년 모습. 그해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이 은퇴한 뒤 긴즈버그는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마음산책 제공

“과한 여담이나 미사여구 없이, 또 의견이 다른 동료들에 대한 산만한 비난 없이 올바른 동시에 단단한 의견을 내는 것이 한결같이 나의 목표다.” (1994년 5월19일, 미국법률협회)

깐깐하고 신중한 성격이 돋보이는 긴즈버그의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중도 노선을 취하면서 “꽉 막힌 잔소리꾼” “꼰대” “왜곡된 페미니스트” 등으로 일컬어지다가 2015년 봄 난데없이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노터리어스 알비지(RBG)’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노터리어스 RBG>, 글항아리, 2016 참고) 그의 얼굴은 머그잔과 티셔츠에 인쇄되고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2018)와 극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이 제작되었다.

대법원 집무실에서 2013년의 긴즈버그 대법관. 그해 그는 마이클 카이저와 존 로버츠의 결혼식을 주례했다. 대법관이 결혼식을 주례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동성 결혼식을 주례한 대법관은 긴즈버그가 최초다. 마음산책 제공

책은 긴즈버그가 변호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룬 중요 사건에 대한 발언, 대중 연설, 인터뷰, 강연, 포럼 등에서 했던 말과 글을 모아 짤막한 잠언처럼 여러 편을 묶었다. 사실 그의 말들은 하얀 레이스 옷깃을 법복 위에 덧댄 악명높은 고령의 여성 대법관으로서 정의와 인권의 수호자가 된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더 큰 감동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1933년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500명 동기 중 9명만이 여성이었는데 로스쿨 원장은 신입 여학생들을 만찬에 초대해 “한명씩 돌아가며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 <하버드 로 리뷰> 최초 여성 편집위원이었지만 “여자”라며 도서관 출입이 가로막혔다. 우수한 성적으로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공동 수석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유대인, 여성, 아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신혼 시절 남편 마틴과(1954). 아이가 학교에서 말썽을 피웠다며 전화가 왔을 때 그는 “이 아이에겐 부모가 둘이에요. 제발 번갈아 전화를 해주세요. 이번엔 아이 아버지 차례예요”라고 말했다. 마음산책 제공

겨우 일자리를 얻은 연방판사 사무실에서 그는 탁월한 업무수행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1970년에 미국 최초의 여성 인권 법률 저널인 <여성인권법 리포터>를 창간하고, 1971년 유산 상속 관련 재판을 계기로 젠더 차별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197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로서 종신 재직권이 보장된 첫 여성 교수가 되어 학생들의 요구로 여성과 법에 대한 강좌를 개설했다. 같은 해 미국시민자유연맹 여성권익증진단을 창립하고 변호사로서 1970년대 미 법원에 제소된 주요 젠더 차별 사건을 대부분 맡았다. 1982년 양성평등을 헌법적 권리로 규정한 평등권 수정헌법안(ERA)이 비준되지 못하자, 긴즈버그는 평생 이 헌법안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연방대법원 대법관 구성원(2019). 사람들이 그에게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 있어야 충분하죠?”라고 묻자 긴즈버그는 “아홉명이 될 때”라고 답했다. 그리고 “대법관 9인체제가 된 이후로 오랫동안 대법관 아홉명이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대법관이 아홉명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라고 덧붙였다. 마음산책 제공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법이 사람들의 생활과 무관하게 논리적이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없고, 사회의 경험이 법에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긴즈버그는 판사가 플라톤처럼 판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가 중립적이라는 착각과 오만을 내려놓고, 자신조차 의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 점점 더 보수쪽에 기우는 일반화를 거스르고 ‘시대의 기후’를 예민하게 읽으려는 팔순 넘은 법관의 고투를 만날 수 있는 책, 꼬장꼬장한 ‘어른’의 목소리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책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