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음악 네멋대로 춤을 춘다 그때 나는 결혼 이후 닥쳐온 가난과 일상에 찌들어 있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파트타임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가정사도 고단했거니와 적성에 맞지 않는 회사 일도 힘들었다. 몹시 위축돼 있었으며 무엇보다 고독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거나 심지어 연민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그 시절 어느 햇살 좋은 날, 지금은 영화평론가의 아내가 된 친구와 함께 참으로 오랜만에 시내의 극장에 갔다. 과자 봉지와 음료수를 들고 재잘거리며 극장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잠시나마 자유의 실감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브레드리스〉의 리처드 기어는 경찰에게 쫓기는 싸구려 시골 건달 제시다. 그의 꿈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멕시코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대생 모니카는 방학 때 시골에서 잠시 어울렸던 제시가 찾아오자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어디에서 구했을까 싶은 굵은 체크무늬 바지에 요란한 재킷을 입은 천박한 취향, 리모컨이 신기해서 가랑이 사이로 권총을 뽑듯 리드미컬하게 이리저리 눌러보는 장난스럽고 낙천적인 모습. 지구를 구원하는 만화 속의 영웅만이 우상인 제시는 삶에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다. 그러나 지도교수의 애인이 되어서라도 출세하고자 했던 모니카의 마음 한편에는 도시의 속물성에 환멸이 있었다. 제시는 섹스가 끝나고 욕실로 가려는 모니카를 붙잡으며 뜨겁게 말한다. “내 체취를 갖고 다녀.” 제시의 맹목적인 순정을 거부하기에는 삶이란 게 너무 숨통을 죄는 위선적인 존재가 아닌가. 경찰에 포위된 제시는 수많은 총구 앞으로 뛰쳐나간다. 다음 순간 경쾌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그의 춤만큼 절망을 숨막히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그 절망은 이 영화의 원본인 장 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보다 훨씬 원색적이면서 강렬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발레리 카프리키스처럼 그가 골라준 핑크색 끈 원피스를 입고 경찰에 쫓기며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남자와 함께 차 안에서 밤을 새우고 싶었던가. 누군가 나를 지친 일상에서 빼내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었으면, 어떤 것이든 좋으니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해주었으면, 며칠만이라도 내 멋대로 함부로 살아보았으면…. 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돈 많고 친절하고 잘생긴 남자는 평생 한번도 기대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 기적이 하필 나한테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키치와 순수의 건달 제시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마지막의 비극은 예정된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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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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