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들이 넘실거린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뚜렷한 요소들 중 하나는 욕망이다. 물론 욕망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이 시대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태들은 각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 인간은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등의 양상들(현실, 가능, 필연 등)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 양상들이 처하게 되는 맥락들과 그것들 자체가 맺는 관계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해야 한다”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신 “~하고 싶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욕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불황기를 맞아 더욱 더 기형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인간이란 자신의 내부가 의지(意志)하는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욕망은 과연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자신이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내면화한(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인) 결과들일 뿐이다. 사람들이 옷을 살 때 신경 쓰는 것은 그 옷이 내게 편할까 하는 것보다는 남이 이 옷을 입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기를 쓰고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것도 실제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할 때조차도 사람들은 타인들이 바라보는 자기 배우자의 모습을 통해서 그 결혼의 의미를 가늠하게 된다. 인간은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타인의 욕망을 가늠하는 잣대, 곧 자신이 타인의 욕망을 간파해내는 잣대는 타인의 눈길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통해서 자신을 판단한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한 인간의 눈길 속에는 그 눈길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판단·감정·요구… 등이 모두 깃들어 있다. 그래서 타인의 눈길은 자신의 거울과도 같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판단하듯이, 타인의 눈길을 보고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판단한다. 타인의 눈길에 비친 자기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기이다.
타인의 눈길로 욕망하는 인간
그러나 여기에서 타인의 눈길이란 반드시 물리적 눈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현존(現存)하지 않을 때에도,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마주대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대접’은 곧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눈길이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 회사에서 받는 ‘대우’… 등등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대접·대우는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눈길이 모두 모여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다. 그 거대한 눈은 타인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우리는 그 눈을 ‘사회’라고 부른다.
이 보이지 않는 눈, 거대한 눈길은 어떤 이름에 응축된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명사이지만, 동물·가구… 같은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일정한 자리를 함축하는 이름이다. 회사에서 계장·과장·부장… 같은 이름들은 타인들의 다른 눈길, 사회의 다른 대우를 함축하는 이름들이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름을 욕망하게 된다. 예컨대 의사·변호사·사장… 같은 이름들은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이름들이다. 타인들은 이 이름들을 욕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들이 욕망하는 이 이름들을 욕망하게 된다. 어디에 가나,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이 이름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조선 시대에는 태어날 때 이미 이런 이름들을 가지게 된다. ‘이’(李), ‘김’(金), ‘박’(朴) 등의 이름(즉 성)은 이미 한 인간을 사회의 어떤 자리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났다. ‘~대학(출신)’, ‘~회사’… 등등. 이 수많은 이름-자리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거기에서 응축되는, 곧 타인들의 욕망이 응축되는 곳이고, 그래서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욕망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름-자리들은 일정한 체계를 구성한다. 소위·중위·대위… 같은 이름-자리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정한 유기적 체계를 구성한다. 체계를 구성하기에 눈길들로 기능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각각이 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즉 하나의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그것의 자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단순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함축하는 체계이기에 차라리 체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타인들의 눈길은 일정한 체제를 형성한다. 즉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무엇이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드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왜 우리는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런 이름-자리들이 체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두 권력은 국가장치와 자본주의이다. 국가장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이 욕망 서열화·체계화
20세기 중엽 마르크시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학교·군대·공장·병원·회사·종교단체… 같은 장치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 불렀다.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이 국가장치라는 대타자들(커다란 타자들)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것들은 타자들이다. 그런 타자들 중 국가장치들은 커다란 타자들이다에서 어떻게 소주체들(작은 주체들)로 길러지는가를 규명했다. 학교·군대… 같은 대타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부를 때)“조국이 너를 부른다!” 우리는 그 대타자들이 길러내는 소주체가 된다. 알튀세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과 상보적이다. 푸코가 우리를 소주체로 길러내는 훈육장치들을 역사·시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면, 알튀세는 국가장치들을 사회·공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고 하겠다. 우리의 욕망은 이 훈육장치들/국가장치들 속에서 길들여지고 박제화된다.
마치 타원의 두 초점처럼, 국가장치와 더불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이다. 근대적 국가장치와 쌍둥이로 태어난 자본주의 체제는 오늘날 국가(‘국민국가’)와 복잡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지배하고 있다.
국가·자본이 욕망을 길들여
자본주의는 얼핏 우리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등 기존의 사회들과는 달리 결코 욕망을 부정하거나 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공기나 물과도 같다 해야 할 현대 문화를 창조해냈다.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발달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날개이다. 자본주의는 컴퓨터·휴대전화… 같은 테크놀로지들과 스포츠·연예… 같은 대중문화들을 두 날개로 삼아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욕망을 부추기고 조작해낼 뿐 긍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돈이 되는 욕망(대중의 욕망)만을 긍정한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쥐어짜듯이 우려내 돈을 포획해 간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주의의 욕망은 대중의 욕망을 식민화해 우려 짜낸다. 천박한 욕망의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다.
전통 문화에서 천박한 욕망에의 저항은 대부분 욕망의 제어(유교)와 제거(불교)를 통해서 추구되었다. 우리말 ‘욕망’이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면서 사용되는 것은 이런 전통 문화의 영향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라는 고전적인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들에 대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욕망에 저항하는 다른 욕망, 저항하는 욕망, 건강한 욕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배하려는 욕망과 천박한 욕망에 저항하는 위대한 욕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사상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입장에서 ‘욕망의 철학’을 전개했다. 전자의 길(욕망을 비우라는 전통사상의 가르침)을 우리는 ‘소요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길(권력의 욕망과 싸우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가르침)을 ‘투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이 두 길 사이에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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