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
백만 원은 못 번다 |
‘은/는’과 ‘도’가 격토가 아니라 이웃한 문장들의 연결 관계를 보여주는 이음씨(접속사) 비슷한 구실을 한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은/는’은 말을 새로 시작할 때나 앞의 내용과 다른 것을 말할 때 쓰이는데, 말을 바꿀 때는 ‘그러나’의 뜻이 된다. ‘도’는 같은 문맥을 계속 이어갈 때 ‘그리고’라는 뜻으로 쓰인다.
‘은/는’과 ‘도’에는 이런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이들이 한 문장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오로지 그 안에서만 쓰이는 쓰임새도 있다. 셈말에 붙어 문장을 부정하는 ‘안/못’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그것이다. “백만 원도 못 번다”와 “백만 원은 못 번다”를 관찰해보라. 같은 백만 원이라도 앞의 말은 그것을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여긴 것이고, 뒤의 말은 큰돈으로 여긴 것이다.
“나는 턱걸이를 열 번도 못한다”와 “턱걸이를 열 번은 못한다”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앞의 말은 ‘턱걸이 열 번’이 별것이 아닌데 그것도 못한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턱걸이 열 번’이 꽤 많은 것인데 그 정도까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도 다시 말장난에 쓰인다. 어느 쪽을 말하거나 듣는 이는 상대가 턱걸이를 열 번은 아니라도 예닐곱 번은 하겠거니 지레짐작하여 듣는다. 실제로는 턱걸이를 한 번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면 말하는 이는 듣는 이의 지레짐작을 이용하여 말로 그를 가볍게 속인 것이다.
부정문에서 셈말과 붙은 ‘은/는, 도’의 쓰임은 완전히 그 문장의 경계 안에 머문다. 이들과 함께 붙어 쓰이는 셈말을 규모가 큰 말로 보느냐 작은 말로 보느냐에 따라 ‘은/는’이나 ‘도’가 결정된다. 큰 셈말에는 ‘은/는’이, 작은 셈말에는 ‘도’가 붙어 문장을 부정한다.
안인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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