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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9 17:07 수정 : 2005.01.19 17:07

18일 저녁 70년대 소설가모임(작단)동인들이 신년회동을 위해 서울 인사동 한식당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9명 뜻모아 80년 5월까지 3집 내
머리 허옇게 세고 20년만에 해후
인생이 보이는 눈으로 ‘작단4’ 얘기

“살이 많이 찌셨네. 이게 얼마 만이오? 공직에 계시니까 통 볼 수가 없네요.”

“저야 언제 불러 주시나 했죠.”

“높은 데 있을 땐 안 찾아가는 게 도와주는 거 아뇨?”

18일 저녁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 문예진흥원장을 맡고 있는 현기영씨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인사를 겸한 덕담이 건네진다. 현씨를 맞는 이들은 비슷한 또래의 동료 소설가들이다. 김원일, 한용환, 김용성, 최창학, 이동하, 김국태, 전상국, 김용운, 유재용, 이진우씨 등. 이들은 다름 아니라 저 1970년대 말에 결성된 ‘작단’ 동인들. 당시 마흔을 전후한 나이의, 인생에서나 문학에서나 절정기에 이른 소설가 9명이 뜻을 합쳐 만든 모임이었다. 전국 차원의 소설가 동인으로는 사실상 해방 이후 처음이었던 ‘작단’ 동인은 79년 3월의 첫 동인집 〈졸밥〉에서부터 80년 5월의 〈작단 3〉에 이르기까지 맹렬한 활동을 펼쳤다. ‘작가’ ‘소설시대’ ‘작법’ ‘창작’ 등 80년대 초중반에 경쟁적으로 출현했던 소설 동인들의 시효가 바로 ‘작단’이었다. 이날의 전체 모임은 3집 발간 이후 사반세기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70년대 말이면 사회적으로도 암울할 때였고 문학적으로는 상업주의가 막 나타나기 시작할 때였어요. 그때 뜻이 맞는 또래들끼리 자주 만나서 술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하다가,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아예 동인을 만드는 게 어떨까’ 해서 ‘작단’이 시작된 거죠. 그때만 해도 잡지도 많지 않아서 작품 발표 지면도 적은 편이었어요.”(김원일)

“우리 바로 위 선배들이 서기원, 장용학, 오상원씨 같은 50년대 작가들이었어요. 그런데 그이들이 대체로 작가로서 조로하는 걸 보고, 우리는 나이 들어서도 꾸준히 쓰도록 서로 격려하고 자극도 주고받자는 취지에서 동인을 시작했죠. 당시엔 만나면 문학 얘기만 했어요. 덕분에 작품을 많이 읽어야 했는데, 그게 정말 좋았어요.”(전상국)


80년 5월의 제3집 발간 이후 동인으로서의 활동은 사실상 멈추었지만, 개별적으로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썼고 그 결과 각자가 한국문학사의 봉우리 하나씩을 이루었다. 농담과 웃음을 곁들여 가며 지난 시절을 맴돌던 화제는 어느새 ‘작단 4집’에 관한 논의로 옮겨간다.

“여기 와서 앉아 있으니, 그동안 내가 스스로 작가인 것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지네요. 다시 동인집을 낸다면 그야말로 십몇 년 만에, 다시 소설을 쓸 거예요.”(한용환)

“우리가 어느새 문단에서 선배에 해당하게 되었어요. 지는 해라 할 수 있죠. 그래도 수평선 위로 번지는 노을처럼 잔잔한 잔영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김용성)

“모르는 이들은 우리를 흘러갔다고 생각하겠지만, 문학이 반드시 새로운 것만은 아니잖아요? 이제는 인생을 보는 눈도 깊어지고 소설 기법도 완숙 단계에 이르렀으니, 죽기 전에 진짜 대표작을 쓰도록 합시다.”(유재용)

‘6월까지 단편 하나씩 써서 제출하라’는 유재용씨의 ‘명령’으로 ‘작단 4집’에 관한 논의는 마무리되었다. 동인들의 의욕대로라면 올해 안에, 무려 사반세기 만의 ‘작단 4집’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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