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박혁거세 왕릉의 모습. 다섯개의 봉분이 모여있어 ‘오릉’으로 불리는 이 무덤에는 혁거세왕을 비롯해 그 왕후와 남해왕·유리왕·파사왕 등이 묻혀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또다른 전설에서는 승천하면서 흩어진 박혁거세왕의 다섯개 유체를 따로 묻었다고 전한다. 이 무덤을 뱀이 지켰다고 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천상에서 찢어진 몸 오곡을 전하다 우리는 건국신화 주인공들의 성스러운 탄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단군·주몽·혁거세·수로…. 모두 위대한 최고신의 혈통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정작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지상을 떠나는 모습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관심이 덜한 것 같다. 고대 국가를 세운 왕들이 지상을 떠나는 모습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들은 대개 최고신인 천신의 자손들이라 지상의 과업을 마치면 하늘로 돌아간다. 그게 신화의 논리다. 주몽의 승천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건국 신화는 고대사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건국주의 죽음도 역사화되어 지상에 무덤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그렇다. 지상과 천상의 중간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는데 백악산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된 단군이 그런 경우다. 이는 아마도 고조선 멸망 후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는 문화가 후대의 전승과 기록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리라. 하늘로 올라간지 이레만에
다섯 몸뚱이 흩어져 지상으로
합장하려 했으나
큰 뱀이 막았다니 이 무슨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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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의 죽음과 능묘 만들기를 둘러싼 이 사건에서 우리가 포착해야할 단서는 둘이다. 하나가 다섯 덩이로 해체된 신체라면 다른 하나는 신체의 합체를 막은 큰 뱀이다. 먼저 승천 뒤 이레만에 다섯 토막으로 떨어져 내린 몸. 좀 끔찍한 느낌은 들지만 죽음과 생명의 영원한 순환이라는 신화적 사유가 여기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면 그런 느낌이 조금은 덜할 것이다. 천지를 개벽한 창조신 미륵의 사체에서 우주만물이 생성되는 우리의 창조신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허쩌족의 시조모인 곰은 아이를 반으로 찢어 허쩌족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혁거세의 죽음에도 뭔가 새로운 생명의 창조라는 상징적 의미가 숨어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신의 주검에서 곡물이 생겨났다고 하는 하이누벨레 유형의 신화를 불러낼 필요가 있다. 1940년대에 옌젠이라는 독일 학자가 인도네시아 벨마레 족의 신화를 조사해 보고하면서 붙인 이름인데 아메타란 남자의 피가 야자나무 꽃에 떨어진 후 거기서 태어난 처녀가 하이누벨레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이 처녀가 축제 때 남자들에 의해 구덩이에 생매장된다. 아버지는 딸의 시체를 파내 잘게 잘라 축제 마당 여기저기에 묻는다. 그랬더니 사체가 묻힌 곳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종류의 감자가 열렸다는 것이다. 야자나무 꽃에서 태어난 처녀가 평범한 사람일 리는 없다. 틀림없이 야자나무 신의 딸일 것이다. 그런데 신의 딸을 죽이다니? 신화학에서는 이를 제의적 살해라고 한다. 신 혹은 신을 대신하는 제물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마련하는…. 그런데 감자라니? 여기에는 벨마레 족이 사는 세람 섬에 감자가 유입되어 이들의 주식으로 자리잡게 된 내력이 스며 있다. 이제 이들에게는 야자의 기원만이 아니라 감자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이누벨레 신화에서 신의 사체에서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하는 창조신화와 동일한 신화적 사유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유형의 신화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다른 유형의 신화나 전설 속에 한 조각 한 조각 자취를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것이 양평 지역에서 채집된 밀 기원 전설이다. 근래에는 구경하기도 어려워진 밀이 어떻게 우리 땅에 생겨났는가 잠시 들어보자. 경기도 양평 땅에 늙고 병든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중국 북경에 명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병 증세를 이야기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소실을 통해 청을 넣어 사람의 생간 셋을 고아 먹어야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들은 처음에는 의기소침했지만 아버지를 위해 약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아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의주 근처 고갯마루로 가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선비가 글을 중얼거리며, 다음에는 중이 염불을 하며, 세 번째는 미친놈이 낄낄거리고 춤을 추며 올라왔다. 세 사람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낸 뒤 시체는 합장하고 돌아왔다. 약의 효력으로 아버지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아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제사를 올리려고 기일에 찾아갔다. 그런데 무덤 위에 전에 보지 못한 풀이 많이 자라 있었고 어떤 것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들은 그 씨앗을 받아와 두어 해 되풀이 심었더니 한 섬이나 되었다. 일부는 빻아 가루를 만들어 먹고 잘 빻아지지 않는 것은 쌓아두었는데 장마가 지난 후 썩어 술이 되었다. 밀에 칼자국이 있는 것은 배가 갈라져 죽은 사람들의 원혼 때문이다. 또 이렇게 술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 세 사람의 혼이 차례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의바르다가, 다음에는 불공드리는 중처럼 술을 억지로 권하고, 마지막에는 미친놈처럼 애 어른도 못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감자 남긴 하이누벨레에서 보듯
곡물기원 신화와 깊은 연관
신성한 건국신화 이야기에
하찮은 곡물담을 담기 어려웠을까 밀의 기원에 술의 기원까지, 거기다가 취중 행태의 기원까지 덧보태져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신화의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세 사람의 사체에서 밀이라는 새로운 곡물이 탄생했다는 신화소(神話素)이다. 하이누벨레의 주검에서 감자가 생성되었다는 벨마레 족의 신화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양평 밀 기원전설을 보면 우리에게도 신의 죽음에서 곡물이 비롯되었다는 신화가 없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토막 난 혁거세의 사체에서 하이누벨레처럼 곡물이 생성되었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는 데 있다. 물론 혁거세 신화는 기록된 건국신화이기 때문에 곡물기원담을 거기 덧붙기는 어렵다. 건국신화가 보여줘야 할 것은 왕의 신성한 탄생과 죽음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승천 뒤 벌어진 주검의 해체와 지상 하강은 건국신화의 논리를 벗어난다. 혁거세의 토막난 사체를 사체화생(死體化生) 유형의 곡물기원신화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이쯤에서 결정적인 두 번째 단서를 꺼낼 때가 되었다. 큰 뱀(大蛇)이 토막 난 사체의 합체를 막았다! 이브를 유혹한 뱀 때문에 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만연해 있지만 뱀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화적 동물이라는 것은 신화학의 상식이다. 대지를 기어다니고 허물을 벗어놓는 뱀, 무척이나 남근을 닮은 뱀의 모습이 그런 상상을 낳고 상징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런 상징을 지닌 큰 뱀이 합체를 막았다면 혁거세의 분해된 사체에서 뭔가 풍요로운 생명이 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흩어져 여러 곳에 뿌려질수록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농업 재배민들의 곡물이다. 그렇다면 하필 다섯 덩이인 까닭은? 이는 물론 사방과 중앙이라는 동아시아의 오방(五方) 관념과 무관치 않을 테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모든 곡물을 상징하는 오곡(五穀) 관념의 소산일 것이다. 곡모신(穀母神)의 성격을 지닌 어머니가 날려보낸 비둘기를 쏘아 주몽이 얻은 것이 오곡의 종자가 아니었던가. 단군이 죽은 뒤 국조신(國祖神)이면서 산신으로 모셔졌듯이 혁거세는 죽은 뒤 국조신이면서 농경신으로 모셔졌던 것이다. 오곡을 마련해주고 풍농을 가져다주는 농경신. 이것이 바로 혁거세의 기이한 죽음에 얽힌 비밀이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mytos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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