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경영으로 우뚝선 자주통일국가
고려는 겨레사에서 첫번째의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다. 그 역사적 위상에 걸맞게 고려는 세계를 향해 선진해양국 다움을 보여주었다.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늘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속에서 역사를 개척해 왔지만, 바다를 잘 경영할 때는 국운이 흥해 나라가 강성했었다. 고려가 바로 그 선례다.
고려는 태생적으로 해양경영에 힘 입어 일어난 나라다. 태조 왕건은 해양호족세력 출신으로서 건국 전에는 궁예 예하의 백선장군(百船將軍) 해군대장이었으며, 건국 후에도 해군총관역을 맡아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사실 왕건은 장보고가 쌓아올린 해양경영의 위업을 이어받아 그 해상왕국이 무너진지 70년도 채 안되어 고려를 일으켜세웠다. 그래서 해양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려는 장보고 해상왕국의 계승국인 셈이다. 이러한 계승성이 고려로 하여금 선진해양국으로 발돋움하게 하고, 주권국가로서의 세계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코레아’ 로 서구에 국호 알려져
고려의 국가적 성격을 논할 때, 흔히 ‘귀족적 성격’이니, ‘불교적 성격’이니, 혹은 ‘대외적 성격’이니 하는 말을 한다. 여기서 ‘대외적 성격’이란 ‘세계성’과 상통하는 말이다. 첫 민족통일국가인 고려는 해양경영을 비롯해 활발한 대외교류활동을 통해 만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서구인들의 뇌리에는 우리나라가 ‘코레아’(고려)란 이름으로 각인되게 되었다. 1224년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에 파견한 사신 루브룩이 그의 여행기에서 ‘섬의 정부 카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서구에 알려진 한국의 첫 소식이자 이름이며, 그 후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둣 딘이 세계통사격인 <집사>(1307~11년)에서 고려를 ‘카올리’라고 지칭함으로써 ‘코레아’라는 이름이 서구에 퍼지게 되었다.
세계를 향한 선진해양국으로서의 고려가 이러한 세계성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주로 천혜의 자원인 해양을 슬기롭게 경영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발달된 ‘우리식’ 조선술과 항해술을 구비하고 있었다. 1274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 때, 하카타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상황에 관해 원나라측 기록인 <원사>는 “원나라 전함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고 전한다. 이 해전에 투입된 고려군의 대선 한 척의 길이는 30여 미터로서 90명이 탈 수 있으며 적재량은 쌀 3천 석을 실을 수 있는 250톤 가량이다. 240여 년 후에 마젤란이 세계 일주할 때 끌고간 5척 배 가운데서 가장 큰 배라야 130톤밖에 안되었으니, 그 우열은 자명하다. 이 원정을 위해 고려는 ‘배 위에서 말을 달릴만 하다’고 한, 이러한 크기의 대선 300척을 포함해 모두 900척의 선박을 불과 4개월만에 건조해냈다.
이러한 높은 조선술로 건조된 배에 최신식 무기까지 장착했으니, 고려 전함은 그야말로 무적함대였다. 그 형상을 보거나 소리를 듣기만 해도 항복하고야 만다는 주화(走火, 날아가는 불)는 화약을 태워 생기는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일종의 로켓식 무기로서, 사정거리는 보통 화살의 두배가 넘는다. 원래 화약은 중국사람들이 발명해 그 제조법을 줄곧 비밀에 부쳐왔다. 그러나 최무선이 2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1373년 화약을 개발해 화포인 주화를 배에 설치했다. 이렇게 화포를 배에 설치한 것은 고려가 세상에서 처음이다. 고려 배는 그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바닥을 평평하게 하거나, 배의 앞뒷면을 유선형으로 만들거나, 난간에 방패와 창을 다는 등의 ‘우리식’공법으로 만들어 그 위력을 배가시켰다.
세계 최초로 전함에 화포 설치
고려는 우수한 해운수단을 이용해 대외무역을 적극 추진했다. 태조 왕건은 무역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중상주의를 표방하고, 15대 숙종은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백성이 각기 그 생업을 잘 닦으면 실로 나라의 근본이 된다’고 하면서 상업을 적극 권장했다. 그리하여 고려는 전례없는 상업의 중흥기를 맞았다. 도시와 지방은 물론, 지역 사찰까지도 상업에 종사해 부를 축적했다. 개경의 시전과 관영상점은 외국으로 보내는 공무역이나 사무역 상품의 공급기지와 외래 상인들의 거래처 역할을 담당했다. 개경에는 신분에 따라 유숙하는 영빈관이니 청하관이니 하는 외국인 전용 숙소가 10여 곳이나 있어 한꺼번에 수백명의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개경과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서 세계 각국에서 온 여러 인종들이 일년 내내 붐비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겨울철에 열리는 팔관회에 참석해서는 공물을 바치고 문물을 교환하며 함께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벽란도엔 각국 상인 드나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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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주요 교역품인 청동거울에 새겨진 배 문양.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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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과 변하는 정세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사신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을 통한 사무역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최대의 이익을 취하는 실리적 무역정책을 추구했다. 이웃 일본과는 김해에 설치한 동남해도부서를 매개로 접촉과 교역을 진행했다. 997년 고려는 세 통의 서한을 보내 통상을 요구했지만 내치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500척의 전함으로 공격을 준비하자 일본쪽은 방어진을 구축하고 버티려했으나 결국 고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일본인들이 진봉선(공물을 바치는 배)에 상품을 싣고 김해에 와서 공물을 바치려고 하자, 조정에서는 위신을 고려해 공물을 세자에게는 허용하나 왕에게는 불허하고, 비밀 누출을 우려해 해로로만 개경에 오도록 했다. 이렇게 눈치를 보며 수동적이던 일본은 13세기 말엽부터 돌연 해적을 보내 노략질을 일삼게 된다. 이어 두 차례 시도한 여·몽 연합군의 원정 등 일련의 혼란 속에서 양국간의 공무역은 주춤해졌으나 사무역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고려의 대외무역활동에서 가장 비중이 큰 나라는 중국 송나라였다. 고려는 두 나라의 중간에 끼어있는 요나라나 거란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능란하게 송나라와의 교역을 유지해나갔다. 비록 초기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국교가 일시 단절되기도 했지만, 곧 회복되어 11세기 약 100년 동안에 송나라로부터 상선만 90여 차례나 오갔으며, 상인들도 4500여 명이 내왕했다. 이들 상인은 대부분 남방에서 활동하는 사무역업자들로서, 그들을 통해 동남아와 대식(아랍)의 상인들이나 특산물이 고려에 들어왔으며, 고려의 물품이 중개되기도 하였다.
공·사 배합한 실리적 무역정책
송나라에서 들여오는 상품은 비단, 금은공예품, 자기, 약재 등이며, 특히 불경과 유학서, 의학서 등 서적이 많았다. 고려에서 수출하는 상품은 나전칠기, 도자기, 옷감, 붓, 부채, 무기, 마구류 따위가 중심이었다. 송나라 수도 개봉에서는 고려의 비단과 도자기, 종이, 먹, 부채가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이나 상인을 위해 고려관을 따로 지어 편의를 보아주며 항상 융숭하게 접대했다. 이에 소식(蘇軾) 같은 문인은 접대 부담과 기밀 누설, 진서의 유출 등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교역에서 송나라는 ‘조그마한 이익도 없는데 고려는 큰 이익을 얻는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사실 고려는 대송 무역에서 여러 가지 특전을 누리고 있었다. 예컨대, 송나라가 일반 외국인들에게서는 상품가격의 15분의 1을 관세로 징수하나, 고려 상인들에게서는 그보다 싼 19분의 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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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인 벽란도 포구를 재현한 KBS드마라 ‘태조 왕건’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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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해양경영을 통한 교류망은 멀리 동남아와 대식까지 뻗어갔다. 장보고시대에 이미 신라 상선이 중국의 남단 광주까지 진출한 데 이어, 고려시대에는 그 이서의 동남아와 인도, 대식까지 내왕과 교류가 확대된 사실이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전반에 하선, 보나합 등의 회회족, 즉 아랍-무슬림 상인 수백명이 세 차례나 집단적으로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 소목(蘇木:외과용 약재) 등 방물을 바치고 후대 속에 비단을 하사받았다. 25대 충렬왕 때는 인도 동해의 코로만델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 마팔아국(馬八兒國: 모바르) 의 왕자 패합리가 침향, 면포(일명 서양포) 등 공물을 보내왔다. 이에 앞서 충렬왕은 대신 채인규의 딸을 공녀로 원나라 승상 상가(桑哥)에게 시집보냈는데, 상가가 피살되자 원의 신속국인 이 마팔아국의 왕자에게 재가시켰던 것이다. 결국 고려와 인도양의 한 소국간에는 이렇게 정략적 혼인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밖에 고려는 오늘의 베트남이나 타이, 캄보디아 등 동남아 나라들과도 여러가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남아·아랍·인도까지 교역망
당시 주요 교역품이었던 청동거울에 새겨진 배 문양은 해상무역이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는 문화와 예악이 융성하고 상선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화가 항구로 들어오니 중국으로부터는 도움 받을 것이 없다’라고 한 11대 문종의 말은 고려의 당당한 자신감과 활기찬 기상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해동천자(海東天子)’, 즉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동방의 천자라고 불렀으며, 중국의 사신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의 사신과 마찬가지로 사대(事大)의 예가 아닌 보통 ‘손님의 예’로 맞이했다. 이렇게 자기중심의 자주적 천하관을 지녔기에 고려는 동방 일각에서 세계를 향한 선진해양강국답게 중세의 지평선 위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역사의 교훈이다.
정수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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