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
‘안/못’ 빼돌리기 |
셈말 중 가장 큰 것이 ‘모두’ 또는 ‘다’이다. 가장 작은 셈말은 ‘하나’다. 그래서 “숙제 다 했니?”라는 물음에 “아직 다는 못했어”와 “하나도 못했어”라는 대답이 나온다. 앞엣것은 ‘다’는 아니라도 숙제를 얼마큼 했을 때 나오는 말이다. 가장 작은 셈말인 ‘하나’에 ‘도’가 붙으면 전혀 못했거나 없다는 말이 되는데, 이 형태는 아주 널리 쓰인다. “돈이 한 푼도 없다.” “친구가 하나도 없다.”
영어에서는 ‘모두’라는 말 앞에 ‘안’을 붙여(not all) 부정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은 부정하는 ‘안/못’을 셈말 앞에 놓지 못한다. 그래서 ‘안/못’을 셈말 뒤에 놓고, 그 대신 ‘모두’ 또는 ‘다’를 ‘는’과 함께 써서 영어와 같은 내용을 표현한다. “사람이 다는 안 죽었다.” 또는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죽지 않고 산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와 ‘도’도 같은 방법으로 부정문을 만든다. “하나도 안 죽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말은 ‘안/못’을 제자리에 그대로 놓아두고 영어와 똑같이 문장을 부정하기 위해 ‘는’과 ‘도’를 이용한다. 이 때 이들은 한 문장의 경계 안에서 쓰이면서 ‘안/못’을 셈말의 뒤로 빼돌리는 구실을 한다. 부정문이 아닐 때는 이들이 이런 뜻으로 쓰이지 못한다. “사람이 다는 죽었다”와 “사람이 하나도 죽었다”가 쓰일 수 없음을 생각해 보라. “숙제를 다는 했다”와 “숙제를 하나도 했다”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안 모두’는 우리말로 ‘다(모두)는 ~ 안’으로, ‘안 하나’는 ‘하나도 ~ 안’으로 바뀐다. ‘안’의 자리가 셈말 뒤로 고정된 탓으로 우리말에는 서양말의 ‘nothing’과 ‘nobody’가 아예 불가능하다. 안인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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