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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6 17:00 수정 : 2005.01.26 17:00

이젠 동-서양 이분법 버릴때

오리엔탈리즘은
해체 되어야 할 제국주의의 유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런 해체가 또 다른 ‘우리’ 를 만든다면
그것은 역사의 불행한 반복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못지않게 옥시덴탈리즘도 허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흔히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말을 사용한다. ‘양(洋)’이라는 말은 바다, 그것도 매우 큰 바다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은 어떤 바다를 뜻하는 것일까? 이 ‘양’이라는 말은 차라리 “바다 건너”를 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은 정확히 어느 바다를 건넜을 때 만날 수 있는 곳일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우리가 ‘동양’과 ‘서양’을 이야기할 때, 이 ‘양’이라는 말에는 일정한 역사적 경험이 묻어 있는 듯하다. 곧 강화도 앞바다에 떠 있던, 멀리 서쪽에서 온 배들에 대한 경험 말이다. 일본인들에게 ‘흑선(黑船)’은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던가. 그 배들은 바다 건너 동쪽으로 왔겠기에 분명 ‘서쪽 바다’의 배들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에는 19세기 말에 동북아 사회가 겪었던 어떤 특수한 경험이 배어 있다. 이것은 ‘오리엔트(Orient)’라는 말에는 바다의 뉘앙스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 말은 단지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해 뜨는 곳”을 뜻했을 뿐이다. 이 “해 뜨는 곳”이 처음에는 다름 아닌 그리스였다! 그리스가 최초의 ‘오리엔트’였던 것이다. 로마인들의 지리적 지식이 확대될 때마다 이 말의 뜻도 계속 바뀌어 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동양’과 ‘서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서양’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실상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몇 개의 국민국가들일 뿐이다. ‘서양’이라고 말하면서 포르투갈이나 루마니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동유럽은 분명 유럽이지만, 과연 우리가 ‘서양’을 말하면서 동유럽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동양-서양 구분기준 애매모호


또 생각해 보자. 아프리카는 도대체 ‘동양’인가 ‘서양’인가? 서쪽의 유럽 아래에 있으니 ‘서양’인가? 아프리카를 ‘서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또 남아메리카는? 북쪽의 미국과 캐나다는 분명 ‘서양’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이 과연 ‘서양’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유럽과 아프리카, 미국·캐나다와 남아메리카, 이들의 관계는 차라리 ‘북양’과 ‘남양’의 관계 아닌가. 도대체 ‘서양’이란 무엇이고 ‘동양’이란 무엇이라는 이야기일까?

유라시아 대륙에만 이야기를 국한시켜도 마찬가지이다.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동북아, 동남아, 혹은 러시아­이런 명칭들도 따져 봐야 하지만 일단 관례대로 쓰자­ 이 모두를 합쳐 ‘아시아’라고, ‘동양’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중동 사람들과 우리가 어디가 비슷한가? 또 ‘인도어’는 서구어와 가깝지 한자와는 전혀 가깝지 않다.(‘인도 철학’은 동북아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서구 철학의 사고와 훨씬 유사하다. 그럼에도 ‘인도 철학’은 왜 ‘동양 철학’일까?) 또 러시아는 서양인가 아니면 동양인가? 중앙아시아를 휩쓸며 지나갔던 그 수많은 인종들이 모두 ‘아시아인’인가?

생각해 보면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은 참으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분법에 기초해 열을 올리곤 한다. “동양은 정신적, 서양은 물질적”이라느니, “서양 철학은 정신-물질 이원론이지만 동양 철학은 일원론”이라느니, “동양은 직관, 서양은 분석”이라느니 …, 이런 식의 표현들을 흔히 본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생각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뿌리를 내리고 무수한 가지들을 뻗고 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호하기 짝이 없는 ‘동과 서’라는 이분법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타인들을 바라보는 눈길(=시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눈길 없이는 사물들을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이란 자신의 눈길로 타인들을 구성해서 바라보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에게 투사하는 눈길은 물리적 의미에서의 눈길만은 아니다. 인간은 신체의 눈길만이 아니라 개념의 눈길을 통해서 사물들을 바라본다. 고유명사, 이름-자리(예컨대 ‘과장’이라는 이름과 그 자리), 범주(예컨대 ‘군인’, ‘사업가’ 등), 규정들(예컨대 “의사들은 ~하다”) … 등의 추상적 틀을 타자에게 투영해서 그 타자를 ‘구성’해서 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이런 비물질적 틀이 전제되지 않는 순수한 신체적 눈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이런 개념적 틀이 전제되는 것이다.

인식주체가 만든 허구 이미지

이렇게 일정한 개념적 틀을 가지고서 타자를 구성해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는 사물을 ‘표상(表象)한다’고 할 수 있다. 표상이란 일정한 개념틀로 구성된 타자로서, 그것은 타자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성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는 이렇게 사람들의 눈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들이 부착되어 있다.

‘동양’이란 ‘서양’의 표상이다. 더 정확히 말해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표상이다. ‘동양’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꼭 ‘서양’인 것만은 아니다. ‘‘동양’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양’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곧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서 어떤 지역, 사람들, 문화를 표상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거기에는 ‘동양’에 대한 표상, ‘동양’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이 표상되면 그것에 맞세워져서 ‘서양’도 표상된다. (‘동양’과 ‘서양’ 같은 식의) 대립적 규정은 언제나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다.



‘동양’을 표상하는, 즉 ‘동양’이라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그 표상의 주체가 누구이건(그 주체가 한국인일 수도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서양’이라는 것을 표상하는, 즉 ‘서양’이라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그 표상의 주체가 누구이건(그 주체가 미국인일 수도 있다) ‘옥시덴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그런 표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뇌리를 깊숙이 지배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옥시덴탈리즘의 한 요소로서 전통보다 발전을 중시하는 태도, 다시 말해,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든다. 그러나 ‘서양’의 한 전형인 프랑스의 리용을 가보면 전통에의 애착과 보존은 정말이지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그에 비해 ‘동양’의 한 전형인 한국의 서울, 또는 다른 도시들은 어떤가? 거기에 도대체 무슨 ‘동양의 신비’, ‘정신문화’가 있는가? 천민자본주의의 물결만이 휩쓸고 다니지 않는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 옥시덴탈리즘의 이미지는 인식주체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허구적 이미지일 뿐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일정하게 고정된 표상/이미지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끝없이 변해 가는 표상/이미지이다. 마르코 폴로 시대의 중국의 이미지와 아편 전쟁 이후의 이미지, 최근의 이미지 … 등은 매우 다르다. ‘서양’에 대한 이미지 또한 시대에 따라 현격하게 달라진다. 더 좁은 맥락에서의 오리엔탈리즘, 즉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은 특히 19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를 거쳐 변형되어 온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오리엔탈리즘은 곧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국민국가들이 다른 지역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지식들, 언어들, 기록들, 보고서들, 사진들, 기획들 … 등 요컨대 표상/이미지의 총체가 오리엔탈리즘이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은 19세기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지배 전략의 한 요소인 것이다. 이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은 근본에서부터 해체되어야 할 제국주의의 유산이라 하겠다.

‘우리’ 라는 일방성도 극복해야

그러나 그런 해체가 또 다른 ‘우리’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역사의 지루하고 불행한 반복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못지않게 옥시덴탈리즘도 허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대한 표상/이미지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식주체들 즉 ‘우리’들을 전제한다. 그리고 모든 ‘우리’들에는 암암리에 타자들을 바라보는 일방적인 시선들이 함축된다. ‘우리’가 가지는 허구적인 눈길들을 끝없이 해체시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정우/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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