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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3 19:30 수정 : 2005.02.03 19:30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 - 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를 주제로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 심포지엄 모습. 민예총 제공.



지난 달 2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본격 철학 논쟁이 펼쳐졌다. 학문의 식민지성 극복을 화두로 한 자리였다. 동시에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접점을 모색하고, ‘우리 사상’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겨레> 29일치 13면)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교장, 장은주(영산대)·홍윤기(동국대)·이병천(강원대)·김선옥(숭실대)·박구용(전남대)·정세근(충북대) 교수 등 여러 인문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날의 토론을 간추린다.

김상봉/ ‘자기애’ 뿐인 서구적 주체성 그대로 따를 수 없다

장은주/ ‘우리 철학’ 또다른 자기애 세계시민적 관점을

미로같은 이 철학논쟁의 실마리는 ‘나르시시즘’이다.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교장은 이날 무려 62쪽의 발제문을 발표했다. 그 제목이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다.

‘자기애’에 빠진 서구적 주체성= 나르시스는 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 죽음에 이른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긍지의 표상이다. 그런데 이런 ‘자기애’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아름다운 사람에게서만 고유하게 나타나는 특수한 자기인식”이다. 이때 ‘아름다움’이란 다른 이와 비교했을 때의 우월의식이다. 이는 곧 타인에 대한 멸시로 번진다. 그 결과는 신화가 말해준다. 죽음과 파멸이다.

김 교장이 보기에 서구적 주체성은 이 나르시스를 닮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주체성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주체성’”이다.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없는 자기애의 길이며 끝에 가서는 죽음과 자기상실에 이르는 길”이다. 서양철학은 끝없이 ‘타자’를 고민하지만, 이때의 ‘타자’란 항상 내 안에서 새로 정립된 타자다. 김 교장은 이를 “타자의 주체성, 타자적 자유를 부정하고 타자를 노예화시키는 전략”이라고 비판한다.


▲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교장
서구적 주체성과 다른 우리의 주체성= 문제는 이런 서구적 주체성이 전 세계에서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있다.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만남’이 가능해야 한다. 서로 다른 요소가 만나고 소통하는 공통의 지평이 돼야 한다. 그러나 서구적 주체성은 자아와 타자의 만남을 배제하고 방해한다. “서양 철학이 형상화한 주체성 이념은 다른 주체성을 모두 감쌀 수 있는 보편적 주체성이 아니다.”

김 교장은 여기에 이르러 “서구적 주체성의 이념은 우리가 그대로 따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주체는 역사적인 것이며, 다른 역사는 다른 주체를 낳는다”는 것이다. 서양 세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제 복잡한 미로의 첫 번째 실마리가 풀린다. 김 교장의 제안은 결국 “자기를 찾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우리의 삶으로 돌아가서, 우리 고유의 문제상황을 우리들 자신의 언어로 해명”하자는 것이다.

▲ 장은주 영산대 교수
우리의 주체성에 숨은 나르시스= 그런데 겨우 풀릴 듯 했던 이 미로는 한번 더 구부러진다. 김 교장이 말하는 ‘우리의 철학’이 또다른 나르시시즘이 아니냐는 것이다. 장은주 교수는 “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구분 짓고, 심지어 한국철학을 떼서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한국 학자들이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읽고 토론하는 것은 ‘한국 철학’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서구에 짓눌렸다는 그 ‘우리’가 과도하게 등장하며 또다른 ‘자기애’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난 세계시민적 관점을 제안한다. 장 교수는 “서양 철학의 낡은 유산을 내면화하는 오류를 피하면서,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철학적 이해와 의미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 이날 토론의 미로는 또다른 사유의 거미줄을 더 쳤다. 박구용 교수는 김 교장의 ‘우리의 철학’과 장 교수의 ‘모두의 철학’을 동시에 극복하는 길을 제안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자’ 철학이다. 우리 안에 있으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타자를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연대성 위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담으려는 전략이다. 김세서리아 강사(성균관대)는 내가 누구이고 동시에 네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면서 자아와 타자가 함께 하는 방법으로 ‘차이-사이의 철학’을 말했다. 동질성을 강조하기보다 이질성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다른 것들 안에서 대화가 가능하다.

정세근 교수는 이번 논쟁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서양철학을 통해 우리는 철학 활동에 필요한 적지 않은 도구들을 어렵고도 힘들게 습득했다. 이제는 서양이나 중국의 철학자를 비판적으로 이해한 한국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한국 현대철학사가 등장할 때가 됐다.” 학문의 주체성, 사유의 주체성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민이 이제 인문학 전체, 한국 사회 전체로 번질 때가 왔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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