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9 09:00
수정 : 2019.12.10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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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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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관심 모았던 경산 소월리 출토 나무쪽문서
6세기 신라 촌락 토지 관리상 담은 목간 드러나
큰 화제 모은 얼굴 모양 토기 바로 아래서 발견
‘골짜기 곡(谷)’, ‘논 답(畓)’, ‘둑 제(堤)’ 등 주목
둑 쌓아 저수지, 논 형성 촌락에 징세 과정 드러나
남한서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 목간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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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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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목간의 6면 글자를 적외선으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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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겨레>단독보도로 세상에 나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이 집중됐던 경북 경산 소월리 신라 유적의 글자 적힌 나무쪽 출토품의 실체가 드러났다.
각진 나무쪽 여섯면에 가득 글자를 적은 이 나무쪽은 길이 70cm가 넘는 국내 최장 길이의 대형 목간으로, 1500여년전 신라 관리들의 토지 행정 문서였다. 6세기께 경산 인근 골짜기의 신라 마을에서 저수지와 논 따위 농토를 조성한 정황, 이후 관리들이 세금를 매긴 현황을 목간
6면에 90자 넘는 한자로 빼곡히 적어 놓았다. 지난 30여년간 남한 곳곳에서 출토된 고대 목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시기도 가장 오래됐을 가능성이 높은 희귀기록물이 출현한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9일 이런 판독 및 분석 결과와 함께 길이 74. 2cm의 목간 사진을 공개했다. 목간은 경산 지식산업지구 진입도로 예정구간인 소월리의 마을 주거터·의례시설 추정터에서 최근 화랑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벌인 끝에 출토됐다. 지난 3일 언론에 공개돼 화제를 모은 5세기 고신라 사람 얼굴 모양 토기가 출토된 지점 바로 아래 쪽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목간은 발굴 즉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으며, 지난 6일 한국목간학회 소속 연구자들인 주보돈 경북대명예교수와 윤선태(동국대)·이수훈(부산대)·김재홍(국민대)교수의 1차 판독 작업을 거치면서 윤곽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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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외선 사진으로 포착한 출토목간 에이(A)면의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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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학회 연구자들에 따르면, 발견된 목간은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각진 여섯면을 만들었다. 각면에는 모두 합쳐 94자로 추정되는 한자를 고루 적었다. 기록된 글자의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경산 인근 지역의 토지 현황을 6세기께 기록한 ‘토지관리 문서 목간’일 공산이 크다. 6면 가운데 2면은 글자를 연습한 습자의 흔적으로 보인다.
기존 국내 목간들보다 크기가 훨씬 커서 발굴 당시에는 목간과는 형식이 조금 다른 대형 나무쪽 문서인 목독으로 보는 추정이 나왔다. 그러나 형식상 대형 목간으로 분류하는게 타당하다는 전문가들 견해에 따라 목간으로 최종확정했다.
주 교수 등 1차 판독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판독된 글자들 가운데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과 논을 뜻하는 답(畓), 둑을 뜻하는 제(堤)’ 등을 주목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목간 내용을 판독해보니 골짜기를 배경으로 형성된 일정한 신라인들의 촌락 집단을 ‘곡’이라 호칭했으며, 둑(堤)이 조세 부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처음 드러났다. 골짜기(谷)와 둑(堤)을 중심으로 한 당시 지방 촌락의 입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쌓은 제방과 그 주변에 자리한 논의 존재, 그곳을 대상으로 조세를 받아가는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배 양상을 함께 엿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윤선태 교수는 “목간에 적힌 기록들은 고신라 시대에 이미 지방 곳곳에 제방을 쌓고 농토를 조성했고, 이를 측량해 세금징수 기반까지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통일 이전에 신라가 이미 국가경영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었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목간에 논을 뜻하는 표현으로 고대 한반도에서 창안된 고유 한자인 답(畓)을 썼다는 점과, 당시 세금(조세)을 매기기 위한 위한 땅 면적 단위로 결(結)이나 부(負)를 이미 쓰고있었다는 점도 판독 과정에서 확인됐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답(畓)은 경남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561년 건립)에 처음 등장한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 판독에서 목간에 등장하는 답(畓)을 통해 목간 제작연대도 비슷한 시기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주보돈 교수는 “새로 판독한 목간 유물은 신라시대 목간을 대표해온 경주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의 가장 오래된 연대인 580년대보다 훨씬 이른 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물론, 남한 출토 고대 목간 가운데 가장 이른 유물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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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목간의 컬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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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리 유적 수혈 구덩이에서 문자가 적힌 다면목간을 발굴할 당시의 현장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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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結)’과 ‘부(負)’가 확인된 것도 의미가 크다. 두 한자는 지금까지 삼국통일 뒤 썼던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번 출토 목간을 통해 6세기까지 썼던 시기를 올려볼 수 있게 됐다.
연구소 쪽은 “당시 신라의 지방 지배와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활동 논의를 진전시킬 중요 자료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연구소 쪽은 자연과학적인 분석 작업을 병행해 앞으로 목간에 대한 추가 판독 성과와 세부 분석 내용을 지속적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추가 발굴조사에서도 출토품들의 고고학적 분석과 주변 유구와의 상관관계를 고려해 더욱 명확한 성격과 시기 등을 규명해나갈 방침이다.
한편, 화랑문화재연구원은 11일 오후 2시 소월리 유적 발굴현장을 공개한다. 지난 3일 출토사실을 발표했던 사람 얼굴 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된 다른 여러 토기들을 볼 수 있다. 목간은 유물 안전을 위해 실물 아닌 적외선 사진 등으로만 내보일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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