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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2 17:56 수정 : 2019.12.13 02:34

큰 나무판 화폭에 유화로 그린 배종헌 작가의 ‘터널산수’ 신작들. 터널 속 콘크리트 벽면의 검댕 형상에서 산수의 영감을 받아 올해 그린 작업들이다.

[연말 쏟아지는 중견 작가 전시회]
‘미장제색’전 차린 배종헌 작가
미장+전통 산수화 접목·재해석

문성식 작가는 4년 만에 개인전
투박·강렬한 스크래치 작품 선봬

청주 칩거생활 해 온 김명숙 작가
먹물·돌가루로 창작의 고통 표현

큰 나무판 화폭에 유화로 그린 배종헌 작가의 ‘터널산수’ 신작들. 터널 속 콘크리트 벽면의 검댕 형상에서 산수의 영감을 받아 올해 그린 작업들이다.

‘터널산수’? 차들이 질주하는 터널에 들어가 밑그림을 그렸다. 벽면의 검댕이나 갈라진 균열을 관찰하며 사생한 연작도를 작가는 그렇게 명명했다.

‘구글춘화’? 작가는 구글에서 다양한 체위의 포르노그래피 도상을 검색했다. 그 이미지들을 벌건 색조에 단순한 형상의 조각 그림들로 재현했다. 제목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심장초상’? 몸 내부 장기의 ‘황제’인 심장을 고뇌하는 인간으로 바라본 작가는 심장의 초상을 수년간 종이에 그렸다. 먹물과 돌가루, 흑연 등을 뿌리고 흘린 심장은 날개 같은 모양이 되었다.

이들의 작업은 기발하면서도 눈을 저리게 한다. 난해하지만, 보는 이를 사로잡는 감성의 무게가 있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연말에 미술판에는 수년간 작업했던 중견·소장작가들의 묵직한 신작과 근작들이 봄날 만개하는 꽃처럼 쏟아진다. 컬렉터들의 외면 속에 깊은 침체기에 접어든 국내 미술 시장의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김명숙 작 <인물 5>. 서울 북촌 갤러리담에 내건 근작이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이 내년 1월5일까지 중진작가 기획초대전으로 마련한 배종헌 작가의 ‘미장제색(美匠霽色)전’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지난 20년간 거리의 잡동사니, 부스러기를 모아 설치 영상 회화 작업으로 재현해온 작가는 우리 눈앞에 사라져 가거나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 이른바 비가시적인 것들을 전통 회화사의 가시적인 요소로 탈바꿈시켜 온 그의 특징을 망라해 보여준다. 시멘트 칠을 하는 장인의 ‘미장’을 전통 산수화의 그림 요목과 결합해 전시 제목으로 삼은 데서도 짐작되듯, 작품들은 기발한 이미지의 재해석을 특징으로 한다. 터널과 건물 벽면의 크고 작은 균열을 푸른빛 산수화의 암봉과 구름의 묘사로 치환한 ‘터널 산수’, ‘콘크리트 산수’ 같은 주요 연작들은 재기 넘치는 상상력을 드러낸다. 도시에 어린 인간 문명의 폭력적인 흔적에서 아련한 자연 산수의 이미지를 끌어내고 교감하려는 작가의 휴머니즘적인 의도가 읽힌다. 커피 포트가 앞에 놓인 어떤 방의 삭막한 콘크리트 벽면을 그린 대형 화폭이 360도 회전하며 전혀 다른 풍경의 구도를 상상하게 하는 신작 또한 작가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시선을 느끼게 한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4년 만에 열린 문성식 작가의 개인전은 그림의 표면을 살펴보는 회화적 재미가 넘친다. 그만큼 기법이나 미의식 등에서 한층 깊어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밀도 높은 연필 드로잉으로 삶과 일상의 세세한 뒤안길을 그려 주목을 받았던 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끌림’이란 화두와 화면을 질박하게 긁어내는 스크래치 기법을 들고 나왔다. 이런 변화의 시작이라 할 2017년작 소품 <끌림>을 눈여겨볼 만하다. 작게 오려낸 화폭 위에 간절한 끌림을 표상하는 손이 장미꽃 줄기로 뻗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질감을 드러내는 재료인 젯소와 불투명 수채물감 과슈를 바르고, 그 위 표면을 송곳 등으로 긁어 투박하면서도 강렬한 효과를 냈다. 조선 전통 화조화를 모티브 삼아 장미 가지를 재현한 대형 연작이나 구글 포르노그래피를 소재로 한 춘화연작 등도 이런 일련의 변화를 다른 형식으로 반영한 것이다.

문성식 작가의 근작 <끌림>(부분, 2017).

2013년 개인전 뒤 청주에 칩거하며 작업해 온 김명숙 작가는 6년 만에 서울 북촌 갤러리 담에 개인전(16일까지)을 차렸다. 하강과 침잠이라는 화두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고통받는 에우리디케의 이미지나 우리 몸 속 핵심 내장인 심장을 초상화처럼 담은 신작을 내걸었다. 작가 내면에 응축된 창작의 고통과 형태를 먹물과 돌가루, 아크릴 같은 다양한 재료들을 흩뿌려 표현한 작업은 이전 작업에서도 보여줬던 작가 자신의 기운을 반영하고 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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