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5.27 09:41 수정 : 2018.05.27 11:36

1983년 첫 기업드라마 <야망의 25시> 제작 때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홍보에 활용했다. 특히 정주영은 서울 청운동 자택의 일상과 부인 변중석의 첫 인터뷰 촬영도 허락했다. 사진은 1981년 현대건설 해외근무 임직원 가족 위로만창장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는 정주영·변중석 부부.

1983년 울산 현대조선 ‘정주영 편’ 촬영
제작진 전원 초대 ‘시바스 리갈’ 건배
정 회장 잔에는 ‘현대양조장표’ 보리차

‘엘리베이터걸 염문설’까지 직격 질문
“맘에 들면 재산 다 주고라도 하룻밤…”
“후계자? 미국 가서 박사 따온 몽준이…”
“경제부총리 시켜주면 확 바꿔놓고 싶다”

정주영 전용차 동승해 계열사 순회촬영
‘정 회장 양아들 고석만’ 주간지 가십
와병중이던 친아버지 호출에 해명 진땀

청운동 자택 일상도 처음 공개해 촬영
변중석 ‘신혼시절 고생’ 얘기에 눈물
“2시간 내내 울음 안 그쳐 끝내 중단”

1983년 첫 기업드라마 <야망의 25시> 제작 때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홍보에 활용했다. 특히 정주영은 서울 청운동 자택의 일상과 부인 변중석의 첫 인터뷰 촬영도 허락했다. 사진은 1981년 현대건설 해외근무 임직원 가족 위로만창장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는 정주영·변중석 부부.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19회) ‘야망의 25시-정주영 인터뷰’

▶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3년 <야망의 25시> 제작 때 고석만 연출은 울산 현대미포조선소의 도크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현장을 배경으로 정주영 회장의 인터뷰를 직접 진행했다. 사진은 세계 최대 선박 엔진공장을 준공한 1978년 현대조선소 도크에 서있는 정주영의 모습. 현대사회복지재단 제공
1983년 울산 현대 미포조선소 도크, 정주영과 직격 인터뷰에 들어갔다. 인터뷰어는 연출자 고석만 감독이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켜지며, 마이크가 채워지고, 수십명의 스태프와 현대 홍보실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 녹화는 방송에 나갑니다. 불편한 부분은 답변 안 하셔도 됩니다.”

고석만: 좀 직설적인 질문입니다. 끊임없이 여자 문제가 소문으로 떠돕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주영: …, ….

고석만: 심지어 사내 엘리베이터걸과의 염문설도 있습니다.

정주영: (킁킁) 나는요… 맘에 쏙 드는 여자가 있으면, 내 재산 다 주고라도 하룻밤 자고 싶어요.

고석만: (한참을 멈칫하다가) 좀 이르긴 합니다만, 후계자는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정주영: (의외의 질문인 듯) 지 실력으로 좋은 대학 가고, 미국 가서 지 실력으로 박사도 따 온 건 몽준이밖에 없어요. 몽준이….

고석만: 다음 질문입니다. 혹시라도 정치엔 관심이 없으십니까?

정주영: 음…, 경제부총리 같은 거 한번 해보라면, 한 6개월 잘해서 우리나라 경제를 확 한번 바꿔놓고 싶어요.(대통령 출마 9년 전이다.)

질문은 계속되었다.

―진정한 부자는 누구인가?

“우리 모든 사람의 목표가 다 같이 재물인 것은 절대 아니다. 나처럼 빈곤을 탈피하기 위해 뛰어서 사업을 하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을 졸업해서, 또는 더 많은 공부를 해서 높은 지식을 갖고 기술자라든가 학자, 성직자, 예술인, 언론인이 되어 사는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각각 자신이 되고 싶은 대로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나는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성취했다면 그 사람은 부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뜻한 바의 성취는 바로 부의 성취이다. 꼭 재물만이 부가 아니다. 돈만이 부는 아니다.”

―기업의 사명은 무엇인가? 재벌에 대한 위화감은?

“첫째, 고용을 증대하고 이익을 내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해 국가 살림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크게는 값싸고 경쟁적인 가격으로 질 좋은 제품을 국민에게 공급함으로써 기업 노력의 과실을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해외 시장에서 커져서 우리나라의 부를 창조하자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우리는 세계 시장에서 벌어들여 국내에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부를 창출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커나가는 데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면 느꼈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재벌’이란 표현이 싫다. 나는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다.”

울산에서 3박4일 촬영 일정 중 이틀이 지나갔다. 온종일 정신없이 찍어대고 오후 늦게 촬영을 마칠 즈음, 현대 홍보실에서 찾아왔다. 오늘 밤 ‘회장 초청 주연’이 있단다. 밤 촬영 스케줄이 있는데 걱정이다. 홍보실과 의논했더니 적절하게 조정하자는 것이다.

울산 영빈관, 큰방으로 안내되었다. 우리 스태프는 38명이다. 교자상을 한줄로 늘어놓았는데도 넉넉한 긴 방이다. 시간이 다가오자 38명의 한복 미녀들이 들어와 일대일로 앉으니, 곧이어 정 회장이 들어왔다. 아무런 절차 없이 양주 ‘시바스 리갈’을 한잔씩 따르게 하고 주연이 시작되었다. 시바스 리갈은 10·26 만찬장에 올랐다 하여 명주로 자리잡았다. 정 회장이 내게 불쑥 양주를 권했다. 내가 정중하게 사양하자, 정 회장은 눈을 끔벅이며 재차 권한다. “현대양조장 술이에요. 드세요.” 모두 우렁차게 건배를 외치며 첫 잔을 마셨다. ‘아니, 이건 보리차?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매일 밤 술자리를 어떻게 버티나.’ 회장은 술잔을 다 받으나, 실제 마시는 잔에는 옆에서 돕는 여성이 ‘현대양조장’ 술을 따라주고 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밴드를 부르고, 악사들이 들어와 악기를 잡자 회장은 성큼성큼 걸어가 ‘해뜰 날’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짬에, 필수 스태프 4명(연출자 고석만, 카메라 김명균, 조명 정병권, 스크립터 여성)과 연기자 박영태(정몽필 역)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예정대로 야간 촬영을 감행했다. 박영태까지 조명라인을 끌며 혼연일체가 되었다. 바로 1년 전, 정 회장의 큰아들 ‘몽필’이 급거 상경하다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이었다.

1983년 <야망의 25시>에서 ‘정주영’을 맡은 최불암은 87년 다큐드라마 <기업인>에서도 정 회장으로 출연했다. 그런 인연으로 최불암은 1992년 정 회장이 대통령 출마를 위해 창당한 국민당 소속으로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극중 정주영 회장 1960년대말 현대건설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공사를 감독하는 장면. 사진 문화방송 제공
이튿날 아침 일찍 자동차 조립공정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정 회장 일행이 들이닥쳤다. 벨트 돌아가는 소음을 피해 정 회장이 나를 약간 조용한 쪽으로 이끈다. 지난밤의 실례를 나무라는 것이리라. 한데 “엊저녁 촬영 잘했어요?” “네.” 그뿐이다. 멀찌감치 바라본 사람들은 분명 둘이 귓속말을 나눌 정도로 친밀하게 여겼을 것이다. 곧바로 벨트 촬영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옮기려 미니버스 앞자리에 앉아 콘티를 검토하고 있는데, 현대 직원이 뛰어와 ‘회장님이 부르신다’고 했다. 승용차로 다가가니 정 회장은 사장들에게 “내려, 내려” 하고는 나를 옆자리에 태운다. 긴히 할 얘기가 있나 보다. 그렇게 그날 예정된 일곱군데 현대 계열사를 함께 돌며 정 회장은 모두 다른 양상으로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승한 내내 정 회장은 특별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기억에 남는 몇 마디는 “세금을 많이 낸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세금이다”, “세금 많이 내는 게 애국이라지만 너무 많이 낸다”. 뒷날 들은 얘기지만, 음주가무를 물리치고 야간 촬영을 해낸 우리 제작진을 많이 칭찬했단다.

그리고 울산에서 밤새 차를 달려 다음날 아침 이천 현대전자에 도착한 제작진은 깜짝 놀랐다. 현관에 간부급 직원 10여명이 도열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촬영에 돌입했는데, 대형 관광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해온 보조출연자들 사이에서 나를 가리키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정주영 회장 양아들이래.”

열흘쯤 뒤 한 주간지에 ‘정주영 회장, 양아들 고석만’ 제목으로 두 사람의 커다란 사진과 함께 양면을 꽉 채운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를 받아 일간지에서도 두어군데 가십이 나왔다. 그럴 즈음 나는 아버지로부터 호출명령을 받아 상도동 댁에 당도했다. 누워 있던 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아들의 큰절을 받더니, “내가 모르는 아버지가 있냐?” 하며 베갯밑의 주간지를 펼쳐 보였다. 순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다 자초지종을 꼼꼼히 설명했다. “아버지, 정 회장이 제 이름 석자나 기억할지 모릅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가보라며 다시 돌아눕는 것이다.

정주영과 현대는 많은 신화를 남겼다. 쌀장사부터 시작해 건설, 고속도로, 조선소, 자동차, 해외 진출, 이라크 국철공사,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서울올림픽 유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항만공사. 기적으로 소문난 그때의 발상을 물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한 만큼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어 정주영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라며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조선소 도크 완공 전 트레일러로 경사로를 내려가는 방식’, ‘초속 60미터에 살아남는 지붕’, ‘이천 송전탑 직선공사’ 등등 교과서를 뛰어넘는 무용담이 차고 넘쳤다. 재미있게 드라마로 그렸다.

곤혹스러웠던 현대아파트 사건 때의 일화 한 토막. “모두들 언론에 기민대응을 촉구하는데, 내 고향 통천 얘기를 해줬다. 눈은 다 온 다음에 쓸라고…. 통천에는 키높이만큼 눈이 온다. 그 사건도 시간 지나니 아무 일 없죠?”

지금은 이북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태어난 정주영(왼쪽)은 21살 때인 1936년 이웃마을 15살 소녀 변중석(오른쪽)과 중매로 결혼했다. 서울에서 시작한 신혼시절 장남 몽필과 찍은 첫 가족사진.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그 통천에서 결혼한 아내 변중석 여사는?

“어떤 친구가 자기 친구의 말이라면서 나한테 전했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도 돈 많이 가진 사업가도 안 부러운데 다만 훌륭한 아내를 가진 사람은 부럽다’고 하더라고. 이 세상에 부인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에게 가장 ‘현명한 내조’란 가장 수수한 부인의 ‘평범한 내조’라고 생각한다. 집에도 자동차가 한대 있는데, 택시 타고 도매시장에 가서 채소나 잡화를 사서는 용달차에 싣고 그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사람이다. 집에서는 언제나 통바지 같은 걸 입고 있는데 누가 찾아오면 그런 채로 나가 문을 열어주니까 손님은 으레 따로 주인아주머니를 찾는 모양이다. 부부가 결혼해서 일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결혼이라는 형식에 묶여서 자식 낳고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함께 늙어가는 일이다.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제작진은 청운동 자택의 하루를 지켜보기로 했다. 인왕산 아래에 있는 이층집.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서 있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맑고, 바람 스치는 소리가 좋다. 1958년, 50일쯤 걸려 블록으로 ‘후딱후딱’ 지은 집이라 한다. 그나마 훗날 덧대서 붙였는지 식당 쪽은 벽 색깔이 다르다.

1983년 드라마 <야망의 25시> 제작진은 처음으로 정주영 회장의 서울 청운동 자택의 일상을 찍었다. 매일 새벽 5시 일어나 6시부터 세계 곳곳 해외지사의 전화보고를 받는 정 회장의 첫 일과를 극중 최불암이 재연한 장면이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청운동의 새벽은 2층 오른쪽 끝방에 불이 켜지며 시작한다. 오전 5시. 정 회장의 방이다. 30분쯤 조용하다. 귀를 기울이니 샤워 소리가 들린다. 5시30분쯤 회장의 방문 앞에 놓인 신문더미가 슬며시 안으로 들어가고, 또 30분쯤 지났을까, 정적을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시계는 정확히 오전 6시. 그리고 5분 뒤, 또 전화벨이 운다. 정확히 5분 간격으로 약속된 시각에 해외 지사에서 ‘보고 전화’가 오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청운동 자택 주변에 사는 아들네 가족들과 매일 오전 6시30분 아침 식사를 같이 했다. 1983년 <야망의 25시> 제작진에게 처음 공개한 아침 식탁에서 정 회장은 손주의 학교 생활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사진은 1985년 7월 언론에 소개된 모습.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그리고 6시30분, 회장은 방을 나서 식당으로 간다. 식탁에는 정몽구와 손자 둘이 기다리고 있다. 아내와 며느리가 식사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다. 아침상은 매일 교대로 자식 손주 며느리들이 준비하고 다 같이 식사를 한다. 회장은 큰손자가 지난주 시험 본 걸 알고 있다. 자연스럽게 결과보다는 과정을 묻고, 건강을 염려해준다. 그리고 오전 7시 정각, 현관문을 나선다. 마당엔 1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 정 회장에게 정중하게 간청했다. 단 한번도 언론에 나온 적이 없다는 부인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회장은 부인을 한번 쳐다보더니 “해줘” 한마디 하고 나간다. 회장 부자를 앞장세워 청운동 대문을 나선 일행은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내닫는다. 그들의 출근길이다. 떼뭉쳐 돌진해가는 그들의 넘치는 힘이 차가운 미명을 밀어내고 있다.

정주영(앞줄 가운데) 회장은 매일 오전 7시 청운동 집을 나서 계동 현대그룹 사옥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사진은 88년 겨울 몽구(왼쪽)와 몽헌(오른쪽) 두 아들, 직원들과 함께 출근하는 모습.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변중석 여사와 인터뷰가 준비되었다. 이렇게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본격 인터뷰는 처음이다. 긴장을 풀도록 많은 배려를 했으나, 베타테이프 한권이 다 되도록 “예”, “아니요”뿐이다. 테이프를 바꾸고, 시중에 알려진 ‘도둑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제야 웃으며 반응을 보인다. 침입한 도둑에게 몽준의 결혼예물만 쥐여주고 쫓아냈더니, 재벌집에 뭐가 이렇게 없냐고 핀잔을 하더란다. 16살 신혼 시절 얘기 때는 빙그레 웃는다. 옛 이야기를 하자 하니,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눈물이다. 동숭동 뒤쪽 낙산 꼭대기 단칸방에서 시동생들과 네 식구가 같이 살던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울기 시작한다. 늦은 밤 갓등을 켜고 공부하는 시동생에게 불 끄라 소리치던 형, 착하고 머리 좋은 시동생 정신영. 기자가 됐다고 그렇게 좋아하던 시동생을 떠올리며 소리 내어 운다. 5분도 10분도 넘기면서 운다. 끝내 울음은 그치지 않고, 녹화는 중지되었다. 두시간 녹화 동안 앞서간 맏아들 몽필의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두평짜리 도우미방 같은 ‘재벌의 부인 방’으로 들어가면서 운다. 그 방문을 닫고 그는 혼자서 얼마나 울었을까?

정주영(맨뒷줄 오른쪽 둘째)과 결혼한 이래 수십년간 한번도 언론에 드러난 적이 없던 부인 변중석(정주영 앞)은 1983년 <야망의 25시> 제작진의 카메라 앞에서 서울 동숭동 판잣집 단칸방 시절 등 옛 이야기를 묻자 울음을 터트려 끝내 촬영을 제대로 못했다. 1953년 피난지 부산 범일동에서 모친(한성실·앞줄 왼쪽 둘째)와 함께 한 정주영의 대가족.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고석만 연출은 1987년 다큐드라마 <기업인> 제작을 맡아 정주영 회장과 다시 인연을 맺는다. 사진은 정주영이 유조선 물막이 공사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서산간척지를 배경으로 통일의 꿈을 밝히고 있는 <기업인>의 마지막 장면. 문화방송 제공
정 회장에게 물었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과 같다고 하시는데?

“서산 간척사업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내년 이맘때면 4700만평의 간척지가 생깁니다. 서산에 가면 여지없이 떠오릅니다. 겨울에도 쉬지 않고 눈발을 헤치고 한뼘 한뼘 땅을 일구시던 아버님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언젠가 통천의 소년으로 되돌아가 서산 농장에서 트랙터를 몰고 싶어요.”

통천에서 울산으로 그리고 서산으로 이어지는 삼각벨트가 된다. 현대의 기업 마크이기도 하다. 정주영, 그는 진정으로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그때가 1983년, 이후 정주영에겐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