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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1948년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서 누나(다섯번째 사진 오른쪽)와 형(세번째 사진 왼쪽) 아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임신 때부터 내내 앓다가 8살 때 돌아가신 까닭에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그뒤 50여 차례 가출을 반복하며 반항의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 5학년(다섯번째 사진) 때 현상금까지 내걸렸던 첫 가출 소동 뒤 부친(네번째 사진 오른쪽)은 변산해수욕장에 데려가 함께 놀아주었다. 고3(맨오른쪽 사진) 때 마음을 잡고 영화 공부로 진로를 정하고 서라벌예대 방송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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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 위험’ 경고에도 날 낳으신 어머니
내내 앓다가 8살때 4월 첫날 저 세상으로
“만우절이라 웃고 상복 입고 놀던 철부지”
일찍부터 전주시내 극장 돌며 ‘영화’ 섭렵
12살 전주역 빈객차 탔다가 ‘3박4일’ 가출
“현상금 내걸고 온종일 가두방송 소동도”
50여차례 가출 경험 ‘첫 시나리오’ 소재로
1966년 서라벌예대 입학 실기장학생으로
동양방송 ‘경연’ 단막극 ‘흑설’ 5관왕 차지
68년 국군영화제작소 촬영병 ‘월남전’으로
‘백마 30연대’ 소속 전쟁기록 영상기법 터득
영화-TV 고민하다 73년 문화방송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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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1948년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서 누나(다섯번째 사진 오른쪽)와 형(세번째 사진 왼쪽) 아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임신 때부터 내내 앓다가 8살 때 돌아가신 까닭에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그뒤 50여 차례 가출을 반복하며 반항의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 5학년(다섯번째 사진) 때 현상금까지 내걸렸던 첫 가출 소동 뒤 부친(네번째 사진 오른쪽)은 변산해수욕장에 데려가 함께 놀아주었다. 고3(맨오른쪽 사진) 때 마음을 잡고 영화 공부로 진로를 정하고 서라벌예대 방송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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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2회) ‘어머니’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 소년기
여덟살 봄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를 잉태했을 때 병원에선 산모를 위해 아이를 떼어내라 했단다. 출산 때도 이렇게 놔두면 산모나 아이나 둘 중 하나는 죽는다 했다 한다. 어머니는 신장이 좋지 않아 나를 낳은 뒤 아예 8년을 앓아누웠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내게 예술적인 재능이 있다면 어머니가 간직한 그것들을 모두 모아 안겨주고 가신 것이리라. 하지만 내겐 어머니와의 추억이 거의 없다. 얼굴조차 그릴 수가 없다.
돌아가신 그날은 2학년 새학기가 시작된 1956년 4월1일. 어머니는 몸이 많이 부어 있었다. 더 이상 깨어나지 않는 어머니를 보며 만우절이라며 웃었다. 대문 앞에 친 흰 천막 아래 장례 영전에서 상복을 입은 채 대나무 지팡이로 자치기하며 놀고 있는 나를 보며 문상객들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노란색 영구트럭과 수많은 만장과 장례 행렬이 근사했다. 차들이 불을 켜고 줄줄이 달릴 때는 즐거워했다. 전주에서 변산까지 군 경계를 넘어갈 때마다 차들이 늘어나 부안에 이르렀을 땐 “열네대다!” 환호했다. 아버지의 위세가 호남평야를 호령하던 전라북도 양정과장 때였다. 어머니는 멀리 서해 바다가 보이는 변산의 작은 언덕 송림 선산에 묻혔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아버지는 새장가를 들었다. 24살 시골 처녀가 새어머니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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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이 태어나 자란 집은 전주 오목대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한옥마을 중심에 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한옥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에서 찻길 건너 왼쪽 빨간색과 초록색 자동판매기가 놓여 있는 밝은 색 기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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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오목대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으로 교동 한옥마을이 반듯반듯하게 놓여 있고, 내가 태어났다는 기와집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불타던 문화연필 공장과 원불교, 더 옮기면 크고 둥근 돔이 우뚝한 전동성당, 더 오른쪽으로 옮기면 풍남문과 경기전, 그리고 끝까지 오른쪽으로 돌리면 한옥마을 본령, 그 한가운데 우리집이 있다. 우리집을 앞세우고 전주시가 쫙 한눈에 펼쳐져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오목대는 나만의 놀이터이자 숨겨진 동산이다. 풀썰매가 신났고 고추잠자리가 떼지어 노니는 붉은 석양이 있고, 상수리나무와 찌께벌레와 풍뎅이가 있다. 나는 상수리나무에 오르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높은 상수리나무에 오르면 풍뎅이가 나를 반긴다. 이놈들은 대여섯마리씩 떼뭉쳐 한주먹에 잡힌다. 나는 풍데이 냄새가 좋다. 풍뎅이에서는 어머니 냄새가 났다. 풍뎅이는 잡히면 그 자리에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린다. 그런데 이놈을 뒤집어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서 맴돈다. 우리들은 풍데이를 잡으면 재미있어라 목을 비튼다. 그놈은 목을 비틀라치면 맹렬하게 날개집을 펄럭거리며 빙글빙글 돈다. 그 날개집은 바람을 일으킨다. 끝내 숨어 있던 양날개가 비집고 나와 나풀거리며 비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공중으로 날지는 못한다. 그놈의 한계는 거기까지다. 녀석은 사람의 시선이 비켜서면 삶을 향해 버둥거린다. 끊임없이 뒤척인 뒤 비틀린 목은 어느새 되돌아와 있고 눈은 나를 향해 애원한다. 다음날 아침이면 무릎으로 멀쩡한 듯 기어다닌다. 그놈의 생명력과 회복력은 어디서 온 걸까?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불쌍하다며 관습적으로 데리고 잤다. 계모가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같이 잤다. 어느 날 잠결에 나도 모르게 계모의 젖가슴을 더듬다 뿌리침을 당했다. 그 순간 잠에서 깨었다. 아버지도 계모도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데, 나는 밤새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내 일생을 통해 가장 긴 밤이었다. 그다음날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덮던 이불 하나 챙겨 들고 골방으로 옮겨 혼자 잤다. 식구들은 아무도 영문을 모른다. 어미 없는 자식의 설움만큼이나 서러운 소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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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시절 부모 따라다니며 영화를 보기 시작한 고석만은 중·고교 시절 백도·시민(사진)·중앙 등 1950~60년대 전주 시내 모든 극장을 섭렵하며 일찍이 복합문화공간 설립을 구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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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영화 보기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밤마실을 따라갔다. 데려가지 않으면 미리 극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따라 들어가기도 했다. 그도 안 되면 극장 앞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를 들으며 긴 영화의 화면을 상상했다. ‘아! 김지미가 최무룡과 만나네’…. 영화가 끝날 즈음이면 극장 문을 미리 여는데 관객들의 머리 사이로 ‘최은희’가 울고 있다. 간만 보았는데도 배가 불렀다. 나중엔 전주에 있는 극장 세 곳의 개구멍을 섭렵했다. 모든 영화를 다 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동네 친구들과 고기잡이에 나섰다. 중바위 밑의 칼바위를 지나 각시바위를 맴도는 물구덩이를 건너서 저 위쪽에 있는 서방바위 밑에 이르러 판을 벌려놓고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농약을 붓고 고기떼 몰이를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고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농약을 믿고 나를 따라온 친구들은 심하게 핀찬을 주는 것이다. 조그만 방죽 같은 곳에서나 써야할 농약을 흐르는 냇물에 쏟아 놓았으니 될 턱이 없는 것이다. 친구들은 돌아가고 우두커니 서방바위 흐르는 물만 보고 있었다.
석양 무렵 철길 따라 투벅투벅 돌아오는데, 어느덧 집 동네를 지나 전주역 쪽으로 걷고 있었다. 전주역에서 대기중인 어둡고 썰렁한 빈 기차에 올랐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3박4일 남원·순천·부안·줄포를 유전한 최초의 가출이 시작되었다. 이동은 도둑 기차, 낮엔 아이스케키 장사, 밤엔 역 대합실과 빈 객차. 순천에선 모르는 사람을 따라갔다가 양자가 될 뻔하기도 했다. 새벽에 도망 나와 버드내 외갓집을 향해 내달렸다. 해 질 무렵 외갓집에 당도하자 온 식구들이 놀라며 반겼다. 내가 없어진 동안 전주에서는 학교가 비상소집되고 현상금이 300만원까지 치솟았고, 온종일 지프차에서 가두방송을 했단다. 외가 식구들은 번갈아 가며 나를 안고 울었다. 늙으신 외할머니는 소리 내어 우셨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며 우셨다.
그 가출을 시작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50여차례의 가출이 반복되었다. 정치 현장도 들여다보았다. 4·19 직후의 ‘7·29 총선거’ 때는 군수를 지낸 고향 부안에서 국회의원(제5대)에 출마한 아버지의 선거사무소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왔다. 민주당 공천 받으면 말뚝만 박아도 당선되던 선거. 무소속으로 될 법이나 할까. 그때 정치현장의 온갖 추태를 다 보았다.
뒷날 중2 때, 최초의 가출일지를 ‘외갓집 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공보처 주최 ‘전국 시나리오 공모’에 냈으나 물론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때 광화문 국제극장 자리에 10층짜리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그리고 연극·갤러리·오락·당구장을 모두 모아놓은 16층짜리 종합문화관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내 방을 만들어 조직의 두목이 되고 싶었다. 5·16 직후 ‘나는 깡패요’ 팻말을 목에 걸고 종로를 행진하는 깡패들을 보며 비웃었다. 최소한 할리우드 배우 ‘알 카포네’ 정도는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동네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녔다. 종점 패거리와 극장 앞 패거리가 싸움이 붙으면 나는 앞장섰다. 어린시절 비오는 날 미나리꽝 옆에서 형제들과의 싸움 때, 사촌형을 도와 싸우지 못한 비겁함을 씻기라도 하듯 곧잘 나서곤 했다. 싸움법을 일찍 터득했다. 쌈을 두려워 마라. 무서운 건 없다. 겁 먹지 마라. 주먹이 날아오는 걸 보아라. ‘쌈 초단’이 태권도 5단을 이긴다. 선방으로 다운시켜라.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무릎 꿇게 하라.
대충 4년, 험난한 세월을 이렇게 보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철이 들었다. 고3이 되던 어느 날이다. 양아치처럼 길었던 머리도 삭발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얘기했다. “이제 마음 잡고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영화 공부를 하려 하는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학 갈 기초부터 잡아줄 학원에 보내주십시오.”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 계시는데, 그 옆에 앉아 있던 새어머니가 툭 한마디 “미친 놈!” 하는 것이다. 그 한마디에 모든 생각이 뒤집혀 박차고 일어나 현관의 쪽문 유리창을 주먹으로 내질렀다. 유리는 박살이 나고 내 주먹은 방호철망에 반동되었다가 쭉 빼는데 깨진 유리 날들이 칼날처럼 주먹에 박혔다. 피가 쏟아져 나오고 바닥에 뿌리자 유리조각이 우박처럼 소리내며 파편되어 쏟아지는 것이다. 옆방에 있던 누나(고경자)가 쫓아나와 천을 찢어 감싸고 병원으로 내달았다. 가장 가까운 버스종점의 김외과에 들어서자 의사가 외면하며 돌아선다. “저 사람 외상이 많아 안 받아요.” 누나의 외마디 항의를 뒤로하며 두 정거장을 뛰어 지서 앞 병원으로 향하는데 피는 계속 뚝뚝, 도합 36바늘이나 꿰맸다. 누나는 돌아앉아 하염없이 울고만 있다. 과거가 현재에게 진실을 묻는 순간이다.
나의 골방, 나의 베개엔 눈물 자국이 천사의 날개처럼 항상 수놓아져 있었다. 깜빡 잠에서 깨면 등을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가난한 주변에 끊임없이 베풀다 가신 어머니의 뜻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제 실바람도 느끼고, 대나무 소리도 들린다. 줄지어 나는 기러기도 눈에 띄고, 연못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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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라벌예대 방송학과에 실기장학생으로 입학해 강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대학극장’ 운영을 도맡았다. 사진은 서울 돈암동 미아리고개에 있던 서라벌예대 교정에서 직접 카메라를 잡고 드라마를 찍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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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라벌예대 등록금을 건네주시던 날, 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눈물을 비치셨다. 이제 아버지는 젊은 아내에게 모든 걸 다 내주셨다. 가장의 위엄도 경제권도 자존감까지도 다 내놓으시고 당뇨만 안고 계셨다.
나는 정식으로 출가했다. 독립했다. 학교 2층 103강의실 슬리핑백에서 잠자고, 친구들이 날라주는 도시락 까먹고, 대학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 했다. 음향부터 조명, 미술, 카메라, 시설까지 관리하고 운영했다. 실기장학생이 되어 학비를 줄곧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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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예대 방송학과 시절 고석만이 영상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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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사령부방송>(VUNC)에서 전국 대학 방송전공 학생들을 위해 목요일 아침 8시부터 30분씩 순회방송을 편성해줬다. 학생들이 제작해 전국은 물론 아시아권에 방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라디오 드라마’ 월 1회 고정 방송을 따냈다. <배다른 동생의 유괴일지>, <계모의 횡포> 같은 드라마였는데, 그 불편한 스토리를 토해냄으로 우리집 안방에 폭탄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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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1967년 동양방송(TBC) 주최 ‘제2회 전국학교방송경연대회’에서 단막극 <흑설>로 5관왕을 차지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사진은 1970년대초반 홍진기(오른쪽) 동양방송 사장이 드라마 제작진을 격려하는 모습이다. 춘하추동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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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아버지를 놀라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동양방송>(TBC)이 주최한 ‘제2회 전국학교방송경연대회’에서 단막극 <흑설>(黑雪, 고석만 극본·연출)로 7개 수상 부문에서 작품상·극본상·연출상·기술상·연기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것이다. 경쟁 학교인 이화여대와 경희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친구의 갈등을 토대로 그들의 우정과 충돌, 화해에 이르는 속도감 넘치는 설전이 기차 특유의 음향과 절묘하게 드라마에 접목되어(바퀴 소리, 기적, 터널 통과, 급제동, 플랫폼 등) 소리 예술의 진수를 표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동양방송 시상식장에 오신 아버지는, 내무부 근무 시절 아는 사이인 홍진기 사장에게 ‘내 아들놈’이라고 자랑하셨다.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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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입대해 국군 촬영병으로 뽑힌 고석만은 월남전에 파병돼 1년간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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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군대에 갔다. 졸병으로 잘 지내다가,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 촬영병 모집에 응모했는데 <전우신문>에 단독 합격이 발표됐다. 소속 26사단 정훈부에선 징계가 떨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월남에 파병되어 일보를 ‘백마 30연대’에 두고, 촬영병이 되었다. 전쟁터의 촬영병이란 남보다 한발짝 먼저 가야 한다. 포화를 찍기 위해선 멀리 내달려야 한다. 첨병보다 앞서야 할 때도 많다. 전장엔 지뢰, 부비트랩 등 안전사고가 태반이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전장에 가서야 월남 파병의 정치적 진실을 알게 됐다.
“전쟁은 롱샷이다. 전쟁은 클로즈업이다. 전쟁은 플레시 컷이다. 전쟁은 무빙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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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월남 파병 시절 국방부의 <월남전선> 제작에 참여해 촬영부터 편집까지 다 하며 사실주의 영상제작기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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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영상의 기초를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현장에서 찍어 보내는 필름은 내가 편집할 수가 없는 구조라서, 미리 찍을 때부터 편집 콘티를 구상하고 진행해야 한다. 한두 커트가 뒤바뀌면 생사가 뒤바뀌듯, 죽음 앞에서 인간의 참모습도 그렇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예술의 원론적 의미도 보였다. 예술이란 내 시각으로 내 철학으로 새롭게 사물을 발견하여 나만의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제대와 함께 4학년에 편입하고, 쉴 틈 없이 실습 작품에 매달렸다. 6개월간 3분짜리부터 20분짜리까지 크고 작은 작품을 16편이나 찍어댔다. 제작비가 많이 부족했다. 서로의 역할을 바꿔가며 명실공히 ‘동호인 시스템’의 표본을 보이며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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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예대 4학년 복학생 시절 고석만은 실습작업에 몰두해 6개월 사이 16편이나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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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오목대 풍뎅이의 회복력, 생명력을 기억하며 매진했다. 4학년 가을,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지금껏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드라마의 절대선으로 알고 왔던 나에게 ‘프로파간다’와 ‘브레히트’가 다가왔다. 소격 효과를 테마로 졸업 논문을 준비하며 고민했다. 영화를 할 것인가, 티브이 드라마를 할 것인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알고 있다.” 지금껏 나를 이끌어준 어머니의 뜻은 무언가? 백만장자의 구두를 만들 것인가, 백만인의 구두를 만들 것인가? 진로를 <문화방송>(MBC)으로 정하고 낮밤 가리지 않고 매진하여 합격했다. 1973년이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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