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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23 10:59 수정 : 2018.06.23 11:17

고석만은 1973년 문화방송 티브이제작부 소속 조연출로 피디의 길에 들어선다. 1972년 서독 뮌헨올림픽 전야제 개막작으로 처음 공연된 오페라 <심청>(오른쪽 사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세계적인 현대음악 거장’ 윤이상을 발견한 그는 ‘윤이상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피디로서 목표이자 꿈으로 삼았다. 72년 8월1일 빌리 다우메(맨 왼쪽부터) 뮌헨올림픽조직위원장, 윤이상, 캐나다 출신 소프라노 리리언 스키스(심청), 바이에른 주지사 등이 공연 축하연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 첨병 (23회) ‘PD로 가는 길’

고석만은 1973년 문화방송 티브이제작부 소속 조연출로 피디의 길에 들어선다. 1972년 서독 뮌헨올림픽 전야제 개막작으로 처음 공연된 오페라 <심청>(오른쪽 사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세계적인 현대음악 거장’ 윤이상을 발견한 그는 ‘윤이상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피디로서 목표이자 꿈으로 삼았다. 72년 8월1일 빌리 다우메(맨 왼쪽부터) 뮌헨올림픽조직위원장, 윤이상, 캐나다 출신 소프라노 리리언 스키스(심청), 바이에른 주지사 등이 공연 축하연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72년 유신 직후 ‘문화방송’ 첫 소집
정동 사옥 현관서 계엄군 ‘소총 폭행’

73년 2월 사령장 받고 TV제작부 배치
첫날 무교동 ‘월드컵’ 쇼프로 현장녹화
3년간 아침 교양프로 생방송 조연출

67년 ‘동백림사건’ 이후 금기어 ‘윤이상’
오페라 ‘심청’ 영상 보고 뒤늦게 ‘충격’
72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 ‘초연’ 작품
“언젠가는 드라마로 다큐로 만들겠다”

75년 허준 드라마 1호 ‘집념’ 조연출
‘민간요법’ 소개 아이디어 제안 ‘대박’
이은성 작가 건넨 ‘답례 촌지’에 큰돈
“연출자 호통에 반납…치욕스런 기억”

고석만은 1973년 2월 문화방송 출근 첫날 서울 무교동 극장식당 ‘월드컵’에서 쇼 프로그램 녹화작업을 보조했다. 1970년대 신문에 실린 ‘월드컵’ 광고.

■ 첫째 고개-상처입은 용의 꿈

<문화방송> 합격 통보를 받고 첫 소집일, 정동 16층 사옥을 올려다보며 현관문을 통과할 때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의 ‘K16’ 소총이 내 가슴팍을 쳤다. 기습적이다. 아팠다. 이때가 1972년 10월 유신 직후, 계엄령하 도처에 탱크와 기관단총을 거치한 지프차들이 압도하고 있었다. 방송사를 경계하는 군인에게 선머슴 같은 나는 당연히 공격 대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의식화’가 되었다면 이때의 충격이 계기일 것이다.

‘윤이상이 괴전화를 받은 1967년 6월17일 베를린의 아침. 이때부터 누군가의 힘에 끌려 납치되고, 고문당하고, 자살을 기도하고,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고국으로 송환, 이른바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부인과 함께 기소, 그해 12월13일 1심에서 종신형 선고.’

윤이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고, 그의 예술세계를 만나게 된 것은 1972년 8월 뮌헨올림픽 문화행사의 하나로 독일에서 초연된 오페라 <심청>의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였다. 그가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에서 현대음악의 기둥이 된 역사를, 왜 처음 듣게 된 것일까? 이 시대 이 땅에서 ‘윤이상’은 ‘금칙어’였다. ‘상처입은 용의 꿈’을 접하면서 <윤이상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졌다. 피디로서 풀어야 할 큰 숙제가 됐다.

기본 연수를 마치고 정식 사령장을 받은 1973년 2월1일 텔레비전(TV) 제작부에 배치되었다. 홍의연 부장 앞에 다섯명이 줄 서 있을 때 한정진 음악반장이 다가와 “야! 너, 넥타이 풀어!” 그렇게 뽑혀 현장녹화를 나갔다. 무교동 ‘월드컵’ 무대에서 쇼 프로그램 녹화다.

스태프와의 첫 만남은 순조로웠다. 땀 흘려가며 카메라를 같이 옮긴 때문인가 보다. 방송사 사무실에는 내일 아침 생방송을 준비하는 정완재 교양반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로부터 3년 매일 아침 교양프로 생방송 조연출을 맡았다.

■ 둘째 고개-통금 사이렌 소리에 잠들고 잠 깨다

매일 아침 공개홀. 새벽 5시부터 준비해 7시부터 8시까지 <임택근의 모닝쇼>가 끝나면 1시간 동안 세트를 전면교체한다. 육박전 같은 작업이 이뤄진다. 연출 쪽에서 미술세트 작업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스레 그들 사이엔 전우애 같은 것이 생긴다. 그 먼지구덕에서 9시부터 <여성백과> 30분짜리 생방송, 이 프로가 끝나면 2분30초 안에 지하 1층에서 4층까지 뛰어올라 주조정실 슬라이드 체인에 공개홀 자료를 교체하고 내려오면, 30초쯤 숨 쉴 틈이 난다. 그다음 카메라를 돌려 10분짜리 <가정요리>가 생방송된다. 아침 생방송 3개 프로가 끝나면 10시쯤, 주변 단골 식당의 방으로 옮겨 아침을 먹는다. 밥이 나오기도 전에 잠에 빠지기 일쑤다. 오후 시간엔 교양반 다른 프로들의 조연출을 해야 한다. 바둑, 퀴즈, 어린이, 대담 그리고 행사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밀려 있다. 교양반에 배속되는 모든 피디들은 <실크로드>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를 꿈꾸며 들어왔다. 나도 <윤이상 다큐> 같은 프로를 하고 싶다.

고석만은 문화방송 입사 초기 3년간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 조연출로 고달픈 시절을 보냈다. ‘임택근의 모닝쇼’(사진·맨오른쪽)는 1969년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문화방송이 최초로 진행자 이름을 내건 아침 생방송 토크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다.
윤이상은 1967년 현지 유학생 194명과 관련된 이른바 ‘대남적화공작단 사건’, 역대 최대 규모라는 간첩단 사건과 연루되었는데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고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한 혐의라 했다. 평양에서 연 ‘윤이상음악회’는 남북 화해와 통일을 꿈꾸는 화로임에 분명하다. 윤이상은 그 전이나, 그 뒤에도 분단을 거부하는 삶으로 일관한다.

■ 셋째 고개-군고구마 장사를 해도 일류의식을 가져라

추운 밤, 병원에 입원한 선배를 문안 갔다가 그날의 정치 이슈를 전했다. 선배가 그 신문을 보고 싶다 하여 병원을 뒤지고 영등포 시장판까지 헤매고 다녀도 찾지 못했다. 힘 빠져 돌아오는 길에 칙칙한 남폿불 밑 군고구마 장수가 그 신문을 보고 있었다. 다가갔다. 신문값의 몇배를 얘기하며 팔라 했다. 군고구마 장수는 휙 돌아앉으며 그럴 의사가 없단다. 몇배의 값을 더 제시해도 싫단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데 왜 그래요?” 만원까지 주겠다 해도 싫단다. 포기하고 돌아서다가 군고구마를 천원어치 달라며 돈을 냈다. 군고구마 몇개를 받아 들고 가려는데 “아저씨, 이 신문 그냥 가져가세요. 서비스예요.” 그 신문을 받아 오는 발길은 무거웠지만 군고구마는 따뜻했다. 그 군고구마 아저씨는 비록 가난하고 남루했지만, 일류다.

윤이상에게 중요한 대목이 있다. 서양음악의 대가로 꼽히는 작곡가 윤이상의 초창기 작품이 우리가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가곡, 교가, 동요라는 사실이다. 고향 통영 앞바다의 파도 소리, 어부들의 흥겨운 노랫가락, 경남지방의 민요 등. 윤이상이 사용한 물감은 한국이었고, 그는 나중에 붓을 바꾸더라도 물감은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아무리 색감과 붓질이 달라도 윤이상의 음악은 한국의 색을 띤다.

문화방송의 진골, 성골 구분은 엄격하다. ‘스카이’(SKY,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 결집도 무섭다. 삼류라 자처하는 나의 돌파구는, 그들보다 세배의 일을, 십년 정도 줄기차게 하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방식대로 그렇게 실행했다.

■ 넷째 고개-기술이 예술을 구원하리라

유럽의 1960년대는 무거웠다. 특히 현대미술은 30년 넘게 암울한 정체기를 맞았다. 개념미술 아니면 설치미술, 그도 아니면 개념 플러스 설치 정도의 동의어가 반복되었다. 예술종말론이 팽배했던 시절, 모두를 놀라게 하며 나타난 플럭서스 운동. 변화와 움직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운동, 그 중심에 백남준이 있다. 인간과 기계가 만나는 ‘제3의 공간’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이 발현되었다. 물리학에서 차용한 프랙털 아트가 ‘터틀십’(거북선)을 창안해냈다. 눈부셨다.

1965년 서독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두 한국인 예술 거장이 만났다. 앞서 59년 다름슈타트를 통해 신진 음악가로 인정받은 윤이상(오른족)은 63년 첫 북한 방문을 한 뒤이고, 백남준은 63년 부퍼탈에서 첫 개인전을 통해 ‘최초의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름을 얻은 무렵이다.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그날의 예술가들은 엄숙주의를 배격하며 기술 발전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1965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을 만난 윤이상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작곡가 윤이상은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을 융합하며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조해 냈다. 윤이상 덕분에 국악이 닿기 어려운 곳에도 국악이 등장했고, 윤이상의 음악을 통해 외국의 음악가들이 우리나라 음악의 기법을 익히게 되었다. 윤이상, 백남준 그리고 이응로. 유럽에 한국 예술을 꽃피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지금 간첩으로 몰려 있다.

■ 다섯째 고개-내일 오시면 공짜

이 간판을 내건 커피숍에 오늘 온 손님이 공짜로 얻어먹기 위해 내일 오면, 또 내일이다. 오늘의 아이디어는 오늘 써먹어야 한다. 단막 드라마의 소재를 찾아 끙끙대는 선배들이 후배에게 말한다. “네가 갖고 있다는 그 원작 소재를 내놔라. 네가 연출하게 될 때쯤엔 구식 된다.” 옳은 말씀이다. 요즘의 트렌드는 빛보다 빠르다. 오늘에 충실하라는 종교적 해석도, 큰 맥락에선 궤를 같이하고 있다.

<수사반장>의 조연출을 맡았을 때, 이상현 작가가 프롤로그 아래, 꼭 서브타이틀을 설정했다. 대체적으로 자막을 슬라이드로 처리하는데, 조연출로서 자발적으로 야외촬영을 감행하여 20초짜리 서브타이틀백을 필름으로 제작했다. 새로운 접근, 특이한 수법에 작가와 연출이 참 좋아했다. 오늘의 내 역할에 충실했다.

■ 여섯째-멘토는 없다. 이 시대의 트럼펫이 되어라

큰 물결은 발원지를 떠났다. 시대는 이미 집단지성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촛불의 혁명적 열기를 예견한 것이다. 광화문에서 보여준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광화문의 촛불혁명은 거기까지에 서 있다.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선보인 오페라 <심청>으로 유럽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반열에 오른다. 특히 심청을 연기한 소프라노 리리안 스키스(왼쪽)는 서양인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제대로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고봉인, 첼리스트이자 물리학자는 윤이상의 <심청>을 듣고 얘기했다. “첼로는 솔#에서 안간힘을 다해 4분의 1 음까지 음정을 높이지만, 끝내 라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트럼펫이 대신 라를 달성해주며 협주곡은 끝난다. 현실의 우리는 저 트럼펫 소리를 과연 언제쯤에야 들을 수 있을까?” 윤이상은 평소 첼로를 자신의 목소리라 말하곤 했다. 윤이상의 통일 염원은 절절히 저 트럼펫 속에 담겨 있었다.

■ 일곱째-내 것으로 만들어라

“윤이상 음악은 흐름, 리듬, 음과 음 사이의 입체적 공간, 그리고 음에 담겨 있는 감정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러면 국악이 들린다. 기타의 피크를 사용해 첼로의 현을 튕기면 거문고, 손톱으로 첼로를 튕기면 가야금, 널찍한 비브라토를 사용해 반음을 오르락내리락하면 아쟁…, 나아가 음색과 우리말도 알아챌 수 있다. 한 음의 시작, 움직임과 마무리를 어떻게 조절하라 등, 윤이상이 악보에 적어놓은 지시를 따르면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의 고유의 억양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윤이상의 음악은 현대음악에 익숙한 유럽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훨씬 더 친근감이 있다. 그러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져온다. 그의 음악을 한국의 음악가가 연주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를 마음으로 표현하는 데 더 유리하지 않을까?”

윤이상의 명곡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주옥같은 명작들을 어떻게 하면 다 듣고, 보고, 널리 전할 수 있을까?

■ 여덟째-결혼은 운명적이다

고석만은 1974년 26살 때 중매로 결혼했다. 하필 담배를 들고 있는 사진을 예비신부집에 보내 장인에게 ‘퇴짜’를 맞을 뻔 했다.
아내 진경옥, 1974년 7월14일 형수의 주선으로 처음 만나고, 그날로 결혼을 결심하고, 그해 11월9일 결혼식을 올렸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은평구 대조동 단칸방에 들어설 때 호주머니엔 만오천원밖에 없었다. 그 뒤 두 딸 태어나 시집 잘 가서 서로 사랑하며 잘 살고 있다. 결혼은 운명적이다.

■ 아홉째-피디 비리 사건의 진실

피디 비리 사건은 주기적으로 터진다. 전략적이다. 검찰은 자료를 쌓아 놓고 있다.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될 때, 이 땅의 인기 선호직업 순위 톱이 된다. 사건이 터지면 잡혀갔다 온 피디도 있고, 도망갔다 온 피디도 있고, 숨는 피디도 있고, 회사의 징계를 받는 피디도 있지만, 대다수의 피디들은 억울하다.

윤이상의 후두부엔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상흔이 있다.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고문실에 있던 무거운 금속 재떨이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쳤다. 고문실에서의 굴욕·고통·절망이 얼마나 혹독했겠는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민족의 국가권력에 의해 말살될지도 모른다. 윤이상의 지극히 고음의 소프라노로 비명처럼 울려 퍼지면서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절, 참으로 비통하고, 아름다운 소리, 그 심상은 잔인하고 냉혈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살육당한 사람들의 것이다.

1975년 드라마 <집념> 조연출을 맡은 고석만(오른쪽)은 주인공 허준(김무생·가운데), 유이태(김인태·왼쪽)와 스튜디오에서 함께했다.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집념>의 조연출 때. 원고 늦기로 소문난 이은성 작가를 밀착마크하는 임무다. 작가실 구석에서 원고를 기다리다가, 드라마에 민간요법을 쓰시라 제안했다. 처음엔 펄쩍 뛰더니, ‘아들 낳는 법’이 방송되자 방송사 전화가 마비되었다. <집념>의 인기는 치솟았고 횟수는 연장되었다. 원고를 기다리며 읽고 발췌해 알려준 <동의보감>의 각종 민간요법이 화제가 되었다. 이은성 작가는 감사의 표시라며 봉투 하나를 주머니에 찔러줬다. 하루 종일 주머니 속의 봉투를 만져보며 떨렸다. 사회에 나와서 방송사에 들어와 처음 받아본 촌지다. 저녁 집에 들어가서야 열어 보았다. 아내도 놀랐다. 10만원, 한달 봉급 8만4천원보다 많다. 그 다음날도 떨렸다. 이틀 뒤 표재순 연출이 “은성이한테 돈 받았지? 이리 줘!” “아… 예, 집에 두고 왔습니다. 내일 갖다드릴게요.” 그 다음날이 봉급날이다. 봉급과 함께 모자라는 돈은 주머니를 털어 10만원을 전했다. 치욕스러웠다. 내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다.

■ 열째-피디의 조건

퀴즈! 녹화가 진행되는 부조정실에 들어가면 피디는 외롭다. 기술 스태프만 십여명 속에 피디는 혼자다. 퀴즈! 누가 가장 유능한 피디인가? 1. 주위 시선 아랑곳 않고 시침 떼는 관록형 2. 군것질 먹거리나 음료를 듬뿍 사들고 부조에 들어가는 선물형 3. 완벽하게 준비하여 현장을 제압하는 압도형 4. 모든 스태프에게 끊임없이 “예, 예” 아부형 5. 녹화 뒤 스태프들과 질펀한 회식을 약속한 음주형. 정답은 몇 번일까? 하나의 답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정답은 다섯개를 다 찍어야 한다. 슬픈 현실이지만 방송사에서 피디는 영원한 ‘을’이다. 그러니 좀 한다 하는 피디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나간다. 나가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거긴 더 깊숙한 대정글이다.

윤이상은 사회생활이나 예술에서 근원적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 그것은 그의 본질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윤이상을 잊어도 좋은 때가 아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3살부터 통영에서 산 윤이상은 평생 통영을 진짜 고향으로 여겼다. ‘동백림 사건’ 이후 내쫓기듯 독일로 돌아가 고국땅을 밟을 수 없었던 그는, 음악 연주차 일본을 방문할 때면 낚싯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통영 앞바다를 그리워하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온 고향에서 편안히 잠드셨을까?

연출로 가는 길, 조연출 생활 내내 윤이상과 함께 ‘용의 꿈’을 꾸고 있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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