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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30 11:00 수정 : 2018.06.30 22:02

고석만은 76년 4월 ‘패밀리 아워’(가족시간대) 편성 규제에 따라 신설된 ‘어린이 명작극장’의 첫번째 작품 <엄마를 찾아서>로 연출 ‘입봉’했다. 세번째 작품 <달려라 삼총사> 출연진과 77년 용평스키장 촬영 때 모습이다. 왼쪽 둘째부터 신민경·송승환, 맨 뒷줄 왼쪽 홍종현·고석만, 앞에 박종범, 오른쪽 한 사람 건너 강남길·임예진 등이다. 고석만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4회) ‘우리 모두의 관심’

고석만은 76년 4월 ‘패밀리 아워’(가족시간대) 편성 규제에 따라 신설된 ‘어린이 명작극장’의 첫번째 작품 <엄마를 찾아서>로 연출 ‘입봉’했다. 세번째 작품 <달려라 삼총사> 출연진과 77년 용평스키장 촬영 때 모습이다. 왼쪽 둘째부터 신민경·송승환, 맨 뒷줄 왼쪽 홍종현·고석만, 앞에 박종범, 오른쪽 한 사람 건너 강남길·임예진 등이다. 고석만 제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70년대 유신정권은 방송의 파급력을 의식해 철저하게 통제했다. 75년 9월 방영된 문화방송 일일연속사극 <집념>의 제목을 대통령 박정희가 직접 작명해 하달할 정도였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김무생·전양자 주연)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은 그 뒤 여러 차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문화방송>에서 방영한 허준의 일대기를 기획할 때, 일일연속극의 제목을 놓고 수십개의 후보가 자웅을 겨루고 있던 어느 날, 텔레비전 국장이 원고지 한 장을 들고 들어섰다. 이윽고 그 원고지 뒷면을 ‘까’ 보이니 한자로 ‘執念’(집념)이라 적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야!” 일국의 대통령이 자상 친절하게도 일개 드라마의 제목까지 정해주시다니. 모두들 놀라고, 모두들 웃었지만, 훈육서의 제호 같은 <집념>(이은성 작가, 표재순 연출)은 곧 일일극의 제목으로 내걸리고, 자꾸 부르니 익숙해졌다. 습관이란 무섭다.

1976년 4월, 텔레비전 방송엔 ‘패밀리 아워’가 일률적으로 설정되었다. 방송이 시작되는 오후 5시부터 9시까지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만 편성해야 하는 ‘가족시간대’가 강제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정부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가족시간대에는 쇼·예능·코미디·드라마의 방송이 금지되고, 검열을 거친 외화, 교양 교육 프로, 건강 다큐멘터리, 스포츠, 뉴스만 허락되었다. 이 시간대에 세계의 명작 동화를 순례하는 <어린이 명작극장>이라는 연속극이 월~금요일 매일 6시30분부터 20분씩, 편당 50회씩 편성됐다.

1976년 4월부터 모든 텔레비전에서는 정부의 ‘패밀리 아워’ 강제편성 정책에 따라 오후 5시 방송 시작부터 오후 9시까지 온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만 방송해야 했다. 쇼·예능·코미디·드라마는 방송을 할 수 없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즈음 표재순 드라마반장의 손에 끌려 정동 방송사 옆 피어선빌딩의 작은 서점에 들어섰다. 한쪽 아동서적 코너 앞에서 “읽어본 명작 동화가 뭐야?” 의외의 질문이다. 눈에 띄는 제목이 ‘톰 소여의 모험’과 ‘엄마 찾아 삼만리’였다. “모험은 어렵겠고… 엄마 찾아 삼만리, 연출해봐!” “연출? 내가?” 이렇게 엉겁결에 연출이 맡겨졌다. 모든 선배 연출자들이 기피하는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이다. 조연출 동안에는 절대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수십번이었다. 여러 가지 인격적 모욕감에 붉어진 얼굴로 ‘자식 보기’가 창피했기 때문인데…,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연출이 된다는 것만으로 우선 기뻤다. 드디어 ‘입봉’이다.

에드몬도 데아미치스 원작 ‘엄마 찾아 삼만리’를 각색하기로 하고, 이기명 작가와 대한극장 옆 아리랑호텔에서 장기투숙 중인 윤혁민 작가를 만났다. 첫 번째 논쟁은 어린이 드라마의 리얼리티 확보였다. 설득했다. ‘아동극이란 동심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문학의 한 장르이다. 옛날이야기, 민담, 우화, 신화, 전설 등과 같은 설화의 종류가 아니라, 그것을 재구성, 개작하거나 또는 그러한 특징을 동화라는 형태 속에 포용하는 것이라면, 오늘의 어린이 연속극은 “종래 있어온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시정신에 입각한 인간 보편의 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양식이어야 한다.’ 윤 작가가 동의했다.

1976년 고석만의 첫 연출작품인 <엄마를 찾아서>의 주인공 천동석(왼쪽)은 하루 만에 대본을 모두 외워 와 연출자를 놀라게 했다. 천재적인 아역배우로 80년대 초반까지 맹활약한 천동석은 지금은 국제적인 사업가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엄마를 찾아서>(1976년). 아동극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다음, 텔레비전의 일상성, 특히 어린이 시간대의 일상성 확보에 주력했다. 시청 패턴을 조정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고편’부터 새롭게 했다. 어린이들은 그 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시간의 주지와 ‘엄마’를 주입했다. 배역 선정에 들어갔다. 엄마에 오미연, 그땐 20대 중반의 미혼이었지만, 아이들 눈높이에 맞췄다. 아이들의 기대치를 자극했다. 적중했다. 주인공에 천동석 8살, 첫 연습날 주의가 산만하더니 대본도 겨우 읽어 내려갔다. 큰일이다. 핀잔을 주었다. 동석이 어머니에게도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연습에서 천동석은 대본을 펼치지도 않고 줄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모든 연습 촬영은 아역배우들 방과후에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화날을 일요일로 잡았다. 문화방송 최초의 일요일 녹화였다. 스태프들의 항의와 불만 속에서 강행했다. 보호자인 엄마들은 방송국 출입을 삼가도록 단속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담임교사와 반드시 전화 통화를 했다. 성적이 떨어지면 배역에서 탈락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마음껏 뛰어놀아라! 유리창이 깨지면 연출자가 다 물어내겠다. 그 대신 녹화는 재미있게, 진지하게, 거짓 없이 잘하자!” 이제, 출연하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스튜디오는 해방구가 되었다.

첫 녹화날, 스태프들은 우려와 반감을 비치고 있다. 부조정실에 들어서는 순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스태프도 있다. 초조하게 녹화 개시. 입봉하는 신인 연출자는 순간, 콘티 대본을 엎어 놓고 디렉팅을 시작했다. 악보를 다 꿰어찬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일주일치 5회 대본을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은 사건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권태수 기술감독은 훗날 기술이사가 되고 대구문화방송 사장이 되어서도 그날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얘기했다고 한다. 고맙다. 8살 천동석도 하는데 내가 못할 게 무어냐.

1976년 ‘어린이 명작극장’으로 연출 입봉한 고석만은 두번째 작품 <철이의 모험>부터 ‘런닝 메이트’처럼 여러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왼쪽부터 당대 최고의 아역배우로 활약하던 홍종현, 강남길, 손창민, 신민경. <한겨레> 자료사진

첫 작품 <엄마를 찾아서>가 성공을 거두자 두 번째 작품부터는 연출자의 자율권을 인정해주었다. 곧 나연숙 작가를 섭외해 <철이의 모험>(1976년)을 기획했다. 작가와 연출이 서로 동의하는 바는, 전래동화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상적인 것으로 하나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하자. 리얼한 존재가 되게 하자. 나 작가는 오빠 나한봉 시나리오작가의 영향을 받아 영화적 문법과 감각을 텔레비전에 전파시켰다.

1976년 5월 방영된 <철이의 모험>의 주인공 콤비인 철이(홍종현·오른쪽)와 꺼벙이(강남길·왼쪽)가 어촌마을 폐선을 무대로 갖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어린이 공상 드라마의 효시로 꼽힌다. <한겨레> 자료사진
<철이의 모험>은 어촌을 배경으로 홍종현과 강남길이 중심이 되어 어린이 드라마답게 ‘공상성’을 그려나갔다. 동화와 소설의 차이를 대표하는 공상성을 어린이극의 특징으로 살린 것이다. 나 작가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만나는 지점쯤에 자리한 것 같았다. 동심천사주의적 경향에 강박되어 있던 한국 어린이 드라마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사상과 내용의 깊이를 확보해냈다. 스튜디오에 거대한 폐선이 등장하고, 폐선의 이곳저곳이 드라마의 주무대가 되었다. 특이하지만 친근하고,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폐선 무대는 꿈의 공장이었다.

후속작으로 <달려라 삼총사>(1977년)가 탄생했다. 전작에 비해 훨씬 리얼리티를 강조한 도시 홈드라마로 기획되었다. 삼총사에 당대 최고의 아역배우 홍종현·손창민·박종범·신민경이 캐스팅되었고 ‘청춘스타’ 임예진·송승환이 가세한 초호화 배역이었다. 이제 주인공 부모만 남았다. 작가와 연출은 긴 시간 고민 끝에 최불암을 캐스팅하고 결재를 올렸다. 데스크에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최불암을 진지하게 만났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지 않았다. 긴 시간 설득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지막 공격 카드를 꺼냈다.

1977년 고석만의 ‘어린이 명작극장’ 세번째 연출작인 <달려라 삼총사>은 초호화 캐스팅으로 시작부터 화제를 모으며 6개월간 장기 방영됐다. 왼쪽부터 삼총사로 활약한 손창민(박준 역)·박종범(창식이 역)·홍종현(김기남 역).

“최 선배는 최고의 배우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도 사랑받고 있습니까? 아들 ‘동녘’이, 딸 ‘동비’에게 배우로서, 아버지로서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 드라마를 자식을 위한 선물로, 봉사할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렇게 당대 최고의 배우 최불암·김혜자가 어린이 연속극에 고정출연하게 됐다. 그 자체로 화제였다.

고석만은 1977년 <달려라 삼총사>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인 최불암·김혜자를 어린이 드라마에 고정 출연시켜 화제를 모았다. 1969년 문화방송 텔레비전 개국 첫 드라마 <개구리 남편> 때부터 부부로 등장했던 두 사람은 78년 <당신>에서도 부부로 호흡을 맞춰 그해 백상예술상을 나란히 받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달려라 삼총사>가 6개월간 본격 일일극으로 성공한 덕분에, 나연숙 작가와 고석만 연출은 러닝메이트가 되어 청소년 드라마 <제3교실>(1977년)로 옮겨 타게 되었다.

<제3교실>은 3년째를 맞아 선배 이병훈 연출 혼자서 힘겹게 유지하고 있었다. 새롭게 바꿔야 한다. 우선 이정길·이효춘 두 톱스타가 맡은 특정 고등학교 카운슬러 배역을 폐지하기로 했다. 소재 또한 학교 안에서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와야 한다. 두 톱스타의 배제는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이병훈 선배도 흔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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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공동연출도 아닌 격주연출 체제라는 당시로서는 특이한 경쟁 구도였다. 매주마다 비교되는 가혹한 현실이었다. 격주 체제가 한 달을 넘기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결국 이병훈 선배는 ‘100회 특집’을 준비하겠다며 빠져나갔다. 후배로서 고개 들고 다니기가 민망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지만….

그런데 <제3교실>이 학교 울타리를 호기있게 뛰어넘을 때는 예상 못했던 ‘심한 제재’에 봉착했다. 표현상의 금기사항이 많았다. ‘77년 지침’이 바로 그것이다. ‘화면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사항! 판자촌·거지·리어카·지게·군인’, 5대 금지에 더해 ‘폭력·애정행각·애무·풍기문란·계층위화 요소가 있는 모든 장면’이 문제였다. 1986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말>지에 폭로했던 ‘보도지침’의 ‘방송 드라마판’이 먼저였던 셈이다.

지침이 아무리 무서웠다 해도, 한국의 방송이 ‘민주주의의 적’이 된 이유는 자명하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성숙한 인간의 사회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여야 한다.”(아도르노) 그때의 한국 방송은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기는커녕 국민을 미성숙 상태로 길들이는 조직으로 퇴화하고 있던 것이다.

[%%IMAGE12%%] 우리는 <제3교실>에서 처음으로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를 정했다. ‘우리 모두의 관심’이다. 곧 인구에 회자되었다. 학교 울타리를 뛰어넘은 <제3교실>이 맨 처음 찾아간 곳은 구로공단이었다. 작가는 30여 차례, 연출자도 20여 차례 ‘어린 여공들’을 만나 소통했다. 처음 인연을 맺은 구로공단 청소년들과 야학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시간도 실력도 부족한 연출자는 국어 시간을 맡아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되기도 했다. 감동이 넘쳐났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작품이 ‘불타는 나무’ 편이었다.

1975년 ‘허준 일대기’ 일일극 ‘집념’
티브이 국장 “박 대통령 친필이야”

76년 4월부터 ‘패밀리 아워’ 강제편성
오후 5~9시 교양·다큐·뉴스만

‘어린이 명작극장’ 연속극 연출 맡아
윤혁민 각색 ‘엄마를 찾아서’로 ‘입봉’

‘철이의 모험’부터 나연숙 작가 ‘단짝’
76년 ‘달려라 삼총사’ 초호화 캐스팅
최불암·김혜자 ‘부모역’…처음엔 거절
“자식들에게 드라마로 선물” 설득 성공

77년 인기 청소년극 ‘제3교실’ 맡아
교실 울타리 벗어나려니 ‘5대 금기’
‘판자촌 거지 리어카 지게 군인’ 불가

방송이 나가자 반향이 컸다.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다음날 아침 눈이 부어 창피했다고들 했다. 그때만 해도 신문이 방송 관련 기사에 인색했는데, <조선일보>(정중헌 기자)는 곧바로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을 실었다. 이례적이었다. 그 뒤 여러 언론의 칭찬 기사가 쏟아졌다. 임상원 교수는 ‘리얼리즘을 살려가는 드라마’라 호평하였고, 정일몽 평론가도 ‘청소년 이해에 도움 되는 드라마’라 평했다. 한편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선정한 ‘가장 바람직한 드라마’로 <제3교실>이 뽑히기도 했다.

<제3교실>이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발길은 일년 넘게 끊임없이 이어졌다. 버스 안내양의 눈물을 그린 ‘기름꽃’ 2부작. 소년원에 갇혀 있는 문제 청소년 이야기 ‘100회 특집―돌기둥’. 고아원 형제의 ‘새벽바람’ 4부작. 소외된 노인과 버려진 청소년의 교감 ‘학 노인’. 성인이 된 고아의 문제점을 다룬 ‘달무리지네’….

나 작가는 실존적 화두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을 사회와 역사의 지평으로 확대해 나갔다. <제3교실>은 가장 사회성이 강한 사실적 드라마로 정착하기 위해 리얼한 표현을 생명으로 하는 야외 로케이션에 과감한 시간과 열정을 들였다.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 결정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직업군도 다양했다. 학생부터 불량 청소년, 직업 청소년, 권투 선수, 어린 파출부, 경마장의 기수, 초보 드러머, 배우 지망생,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 항의도 많았고, 격려도 넘쳐났다.

<제3교실>이 발굴해 배출한 배우도 많았다. 진유영, 김보연, 길용우, 송승환, 임예진, 문영애, 송경철 그리고 연극배우 추송웅, 이영하도 이때 처음으로 안방극장에 진입하였다. 극장에서도 ‘하이틴 영화’가 덩달아 붐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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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교실>의 성가가 비등점에 오를 무렵, 임성기 국장이 나 작가에게,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는 일일연속극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작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게 콤비가 되어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연출 입봉 2년차에 간판 연속극의 연출이 된다? 생각만 해도 떨렸다. 나 작가는 작심했다. 그리고 곧 시놉시스 작업에 들어갔다. 어느 달동네 이야기를 쓰고 싶다 했다. 그즈음 내게는 영화 쪽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영화 제작자로 막강했던 곽정환 사장의 제의였다.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듣는 순간 심하게 흔들렸지만, 첫마디에 정중히 사양했다. 그 뒤로도 두세번 만나 증폭된 제안을 들었지만 거절했다. 내심 나 작가와 일일연속극 연출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포천 부장이 나서며 일이 꼬였다. 김 부장은 라디오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였던 김수현 작가를 내밀었다. 그때 김 작가는 문화방송에 기여한 공적도 컸던 터라 결정은 힘들지 않게 났다. 김 작가의 승리. 이에 나 작가는 심한 배반감에 떨며 동양방송으로 옮겨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야 곰례야!>(1979년). 크게 성공하며 문화방송에 일격을 가했다. 문화방송은 아팠다.

대학 시절 ‘편성론’ 첫 강의 때가 생각난다. 배준호 교수의 한마디 “방송은 반 발짝만 앞서가야 한다. 두 발짝 앞서가면 못 쫓아오고, 한 발짝 뒤처지면 사회적 패악이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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