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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04 11:42 수정 : 2018.08.05 09:22

1983년 ‘야망의 25시’ 중도하차 직후
‘스포츠 드라마’ 집필 선언한 김기팔
“앞으론 무색투명한 작품 쓰고 싶다”

8·15특집극 ‘자전거왕 엄복동’ 기획
일제 초기부터 전국대회 석권해 명성
옛 기사만 들고 작가·연기자들과 탐문

고향 알려진 평택 갔으나 ‘사실무근’
한달만에 손자·누이동생 찾기 ‘성공’
86아시안게임·88올림픽 앞둔 시기
스포츠계 ‘민족적 인물 발굴’에 열광

‘평양 자선왕 백선행’ 이야기도 채록
85년 ‘한국인 재발견’ 시리즈로 소개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9회) ‘자전거왕 엄복동-재발견 백선행’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2년 ‘서민영웅 발굴 시’ 첫번째 주인공 ‘의병장군 신돌석’에 이어 83년 ‘자전거왕 엄복동’을 맡은 탤런트 나영진은 7월 한달 무더위 속에 혼신을 다해 연기했다. 98년 이른 나이에 별세한 나영진의 마지막 주연작인 셈이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김기팔 작가의 변신인가? 우리나라 정치드라마에서 독보적인 김기팔 작가의 스포츠드라마 집필 선언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83년 <야망의 25시>가 돌연 중도하차 당한 직후라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제 치하 1910년대에 활약한 ‘자전거왕 엄복동’을 들고나왔다. <문화방송>(MBC)에서는 1983년 8·15 특집극으로 편성하였다.

1983년 6월 <야망의 25시>를 강제종료 당한 직후 김기팔 작가는 돌연 ‘스포츠드라마’ 집필을 선언하고 이례적으로 인터뷰까지 했다. 고석만 연출과 함께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서민영웅 발굴 작업에 나서 일제강점기 자전거 선수로 조선인의 기개를 떨친 ‘엄복동’을 찾아내 ‘8·15 특집극’으로 제작했다.

언론 노출을 극구 사양하던 김기팔 작가가 <동아일보>에 선뜻 나섰다.

‘“앞으로는 무색투명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라고 제목을 뽑고 6단 기사의 인터뷰가 실렸다. “<제1공화국> <야망의 25시>의 작가 김기팔(45)씨가 이번에는 스포츠드라마인 MBC-TV의 8·15 특집극 <엄복동>을 집필, 시청자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역사 기록이란 치자(治者) 위주의 기록이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피지배층에서도 민족의 영웅은 나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란 거의 전무한 상태이므로 이런 인물을 찾아내서 구체화시키는 것이 작가와 언론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왔지요.” 전에 없이 왜 운동선수 이야기를 8·15 특집으로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명료한 응답이다. (중략) 김씨는 이번 <엄복동>을 계기로 무색투명한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말한다. “반응이 괜찮으면 스포츠드라마란 장르를 개척해서 운동선수를 통한 민족혼을 심어주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후략)”

김기팔 작가, 그가 느끼는 오늘은 암흑의 세월이다. 귀머거리요, 벙어리며, 장님이 되어야 산다. 지금, 그가 스포츠드라마를 들고나온 것은 정치적 화살에서 피하고 싶은 것이 첫째일 것이고, 일제하를 집중 조명하여 감시자들의 관심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사정권 밖에서 구심점을 모아 오늘날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싶었을 것이다.

‘서민영웅 엄복동’ 발굴에 나섰다. 고석만 연출자가 차를 몰고 옆자리에 김기팔 작가, 뒷자리에 주인공 나영진과 후배 정한헌이 앉았다.

엄복동이 도대체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엄복동이 활약하던 시기는 1920년대, 당시로부터 60년 전 일이다.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단편적으로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평택으로 향했다. “떴다 보아라~” 그 음률을 따라서. 우선 여러 사람들이 입을 모아 평택이 고향이라 하여 평택을 찾은 것이다. 시청을 찾아 호적을 뒤졌다. 없다. 이건 만만한 작업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둘씩 나뉘어 배우 두 사람은 옛 중심가 복덕방을 뒤지면서 노인들 탐문에 들어가고, 차편을 이용한 작가와 연출자는 진위천을 시작으로 바람새마을, 평택호를 누볐다. 평택호의 경계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촌락과 오래된 상점을 찾아다녔다. 성과가 없다.

넷이 만나 저녁식사를 하며 한가닥 희망을 보았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를 정확하진 않지만 띄엄띄엄 읊조리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내일은 그 어르신을 집중 추적하기로 했다. 그 어르신과 함께 전통문화의 ‘허브’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소리터에서 십수명을 차례로 만나 끈질기게 추적했다.

1910년대 일제 초기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과 더불어 자전거왕 엄복동은 조선인들이 노래로 칭송할 만큼 영웅이었다. 고석만과 김기팔은 83년 ‘8·15 특집극 엄복동’에서 이 노래를 채록해 소개했고, 방송이 나간 뒤 시청자들의 요구로 음반까지 제작해 보급했다.
유행가 부분은 진전을 보았지만, 엄복동의 고향이 평택이라는 부분은 사실무근이다.

일단 상경하여 라디오를 찾았다. ‘서민영웅 엄복동을 찾는다’는 이야깃거리를 디스크자키 프로에서 고지해주길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후배 자전거 선수들을 만났다. 그 후배들은 근거없이 관철동을 내세웠다. 확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벌써 일주일을 보냈다.

모두가 허탈해 있을 때 활기를 찾은 것은, 엄복동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엄재권(24)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그 역시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자신의 고모이자 엄복동의 누이동생이 의정부 미군부대 근처 고든골인가 하는 곳에서 산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갔다.

동두천 근처의 야전병원 근처에서 엄복동의 누이 엄복순(82)씨를 찾기까지는 시작부터 꼬박 한달이 걸렸다.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사람 한명 찾는 데 한달이 걸린 건 처음이다. 김기팔 작가도 힘들어했다. 행정 시스템을 탓하기에는 우리의 시도가 너무 무모했다. 그러나 답사 과정에서 ‘엄복동’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다. 밤마다 김기팔 작가의 ‘의심의 철학’을 들으며 공감하고, 술주정 속에서 역사를 배웠다. “우리는 후손을 위해 산다. 서민영웅이 진짜 영웅이다.” “답사는 또 다른 창작훈련이다.” 답사는 ‘첨병’의 필수작업이다.

엄복동의 본적은 서울 중구 오장동 143번지. 1892년 태어났다. 형제가 없다는 풍설을 뒤엎고 1남2녀의 맏이였다는 것도 밝혀졌다. 중하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가난한 서민 엄복동은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자전거상 ‘일미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 가게는 일제와 영국제 자전거의 한국 대리점인데 여기서 일을 하다가 자전거에 친숙해져 선수가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1926년쯤에서부터 1940년대까지 전국 민중들의 입에서 크게 구전되었다가 단절된 노래 가사가 마상원 작곡가에 의해 채록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찾아낸 평택의 ‘소리원’에서 채록되었다. 곧 편곡이 되어 8살 황치훈에 의해 녹음까지 완성하였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간다 못 간다 얼마를 울었나.” 당시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발매하여 유행했던 가요 ‘이팔청춘가’에 가사를 얹은 것이다.

1983년 ‘8·15특집극 엄복동’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일제를 이긴 민족적 스포츠 스타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체육계를 중심으로 커다란 반향이 일었다. 83년 8월11일치 <동아일보> 기사.
문화방송의 8·15 특집이 <자전거왕 엄복동>으로 기획된다는 사실에 체육계는 고무되었다. 이제 엄복동의 행적을 재정리하여 그 정신과 기개를 체계화하자는 움직임이 체육계 주변에서 활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88서울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을 치러야 할 한국 스포츠계로선 이런 인물의 정립이 절실해지고 있다. 불우한 처지에서도 사이클 선수로 대성한 엄복동. 그의 극일정신, 그의 업적, 그것은 우리 스포츠와 민족정신의 지표임이 분명하다.

1929년 엄복동이 탔던 자전거를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도 무사히 보관해온 박성률(왼쪽)씨가 선수 시절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한 뒤 엄복동(오른쪽)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83년 특집극 방송 이전까지 거의 유일한 엄복동의 얼굴 사진이었다.
1910년대 영국 라지사 제품인 엄복동의 자전거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로 2010년 근대문화재로 등록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엄복동이 타던 자전거가 현재 서울 태극당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하여 화제가 되었다. 박성렬(대한사이클연맹 자문위원)씨가 보관하고 있던 이 자전거는 박씨의 형이 엄복동의 후배 선수인 조수만씨로부터 당시 돈 500원이란 거금을 주고 구입했던 것. 영국 ‘라지’ 제품인 이 자전거는 ‘라지’사가 상품 선전 및 한-영 우호를 위해 샘플로 보낸 두대 중의 한대라는 것이다. 500원이라면 금 한돈쭝에 5원 정도 했으니까 금 100돈쭝(1983년 시가로 500만원 상당)의 거금이다. 이 자전거는 박성렬씨가 피난 때에도 자전거만을 메고 집을 나설 만큼 아꼈다고 한다. 현재의 경기용보다 안장이 낮고 타이어의 링이 목재로 된 이 자전거는 지금도 한군데 흠이 없다. 이 자전거를 모델로 ‘삼천리자전거’에서는 촬영용 자전거를 새롭게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 자전거를 타고 본격 촬영에 들어갔다.

엄복동의 1923년 전조선자전차대회 우승기념 사진. 83년 특집극 방송 이후 소장자들이 엄복동의 사진과 자료를 제보하면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발굴됐다.
엄복동이 최초로 굵직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13년 4월 서울 용산 육군연병장에서 열렸던 ‘전국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하면서부터였다. 엄복동은 이 대회 ‘일류급’에서 당당히 우승하면서 자전거계의 샛별로 떠오른다. 엄복동은 그 후 평양대회를 비롯, 크고 작은 많은 대회 우승에 이어, 1920년 경복궁에서 열린 ‘경성상공인연합운동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스타로서의 기반을 굳힌다. 당시 몇회나 우승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중의 한 자료(1920년 6.월21일 <동아일보>). “(…) 참가한 선수는 조선 자전거의 유명한 경성의 엄복동군 (…) 운동장 44바퀴를 돌 때 엄군마저 넘어져 군중은 아연실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그래도 조선의 첫째가는 엄군은 다시 일어나 원기를 내어 쫓아가서 남보다 두바퀴 세바퀴를 앞서 영예의 우승기를 받았다. (…) 구경하던 관중들은 환호하였고, 일본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고, 구경 나온 기생들은 치마를 벗어 흔들어 대었다. (…)”

일제강점기 내내 국내외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엄복동은 나라 잃은 조선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김기팔 작가와 고석만 연출은 8·15특집극 ‘엄복동’을 통해 민족적 영웅의 기개를 복원하고자 애썼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엄복동의 인기가 이처럼 치솟자 일본 선수들의 방해공작도 치열했다. 상주대회에서는 70바퀴째에 일본 선수가 의도적으로 밀어 넘어트린 뒤 다른 일본 선수가 밟고 지나가 크게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일미상회에서 치료 중 가게 앞에 군중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록도 있다. 불우한 처지에서도 자전거 선수로 대성, 일제에 짓밟혔던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준 그의 극일정신이 큰 공명을 준 것이다.

주인공 나영진의 분투 또한 눈물겨웠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7월 한달을 자전거 위에서 버티었다. 수많은 보조출연자들이 틈만 나면 그늘로 도망칠 때 그 육중한 몸을 고스란히 햇볕에 내맡겼다. 서민영웅 엄복동. 1미터65센티의 키에 어깨 폭이 넓고 가슴이 유달리 커서 심폐기능이 뛰어났고 하체가 잘 발달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술·담배를 모르고 겸손하고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엄복동 취재를 위해 한달 이상을 소모하면서도 아깝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서민영웅 ‘백선행’의 발견이다. ‘누더기 속에서 영웅 난다’는 우리의 속담과 딱 맞는 영웅을 만났다. 이름없는 야생화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더 아름답다.

1848년 수원 태생 백선행은 14살에 결혼해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뒤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아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 갑부로 꼽혔고, 대부분 재산을 여러 학교와 공익시설에 기부해 1933년 5월 별세하자 평양 주민들이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애도했다. <신동아> 1933년 6월호에 실린 사진.
김기팔·고석만 팀은 서민영웅 발굴 과정에서 찾아낸 일제강점기 ‘평양의 자선왕 백선행’을 1985년 ‘한국인 재발견 시리즈’로 극화했다. 그때 45살 중년 탤런트 김용림은 ‘16살 아기 과부 때부터 85살 별세까지’ 백선행의 일생을 열연했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1848년 평양성 밖 토굴 같은 농가에서 태어난 ‘이름없는 딸’ 백선행(김용림)은 네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논밭 뙈기가 변변히 있을 수 없는 홀어머니와 지내던 백선행은 굶주림 끝에 14살 되던 해, 그래도 끼니를 얻어먹을 수 있는, 산 너머 가난한 농가로 시집간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죽자 백선행은 시집갔던 눈길을 다시 밟고 돌아와 홀어머니와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돈 버는 데 전념한다. 그러기를 10년,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돈을 모아 집 마당에 돈을 묻던 날 밤, 감격한 어머니(김복희)는 쓰러져 죽는다. 외톨이가 된 백선행. 죽은 남편의 계시로 사들인 불모지가 시멘트 광산으로 알려지자 일약 평양 갑부가 된다. 이제 늙어버린 백선행은 돈 없어 못 먹는 백성들과 돈 없어 공부 못하는 2세들의 교육을 위해 전 재산을 민족에게 환원해버린다. 광성소학교에 땅 1만4천여평을 기증하고(1925년 2월) 승현여학교에는 논밭 2만6천평을(1925년 10월) 기부하며 한국인회관(대공회당)을 일본인회관보다 더 크게 짓게 한다. 그러면서 백선행은 조상들의 제사를 모실 양손자에게 그만큼의 재산을 남기는 윤리를 잊지 않았다(1933년 별세). 훗날 사람들은 그가 선행을 했다 하여, 이름을 ‘백선행’이라 지어 불렀다. 85년 ‘한국인 재발견’ 시리즈로 제작해 방송했다.

[%%IMAGE11%%] 긴 시간 공들여 발굴한 ‘자전거왕 엄복동’. 1930년대 초까지 선수생활을 하다 은퇴하였다. 말년에 극히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엄복동은 해방 후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6·25를 만나 동두천 부근의 어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숨졌다. 가슴 아픈 최후다. 그러나 ‘극일정신의 서민영웅 엄복동’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노래가 되어 아직 살아 숨 쉰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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