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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고석만 연출은 김상열 작가와 신경림의 대표 시집 <농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했다. 연말특집 드라마 <농무>의 첫 화면.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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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31회) ‘농무―시 한편으로 만든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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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고석만 연출은 김상열 작가와 신경림의 대표 시집 <농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했다. 연말특집 드라마 <농무>의 첫 화면.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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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4년 주간 ‘베스트극장’ 연출 맡아
첫 작품으로 윤정모 단편 ‘길동무’ 준비
리영희·이호철·박현채·송기원 등
‘진보인사들 통일전망대 등 답사기행’
촬영 첫날 아침 단체버스 출발 직전에
조연출 뛰어와 “제작 중지 명령” 전달
두번째 작품 신경림 시집 ‘농무’ 기획
제작본부장 “체크하는 사람 없었어?”
“결재” 알리다 얼결 ‘블랙리스트’ 고백
‘연말특집극’으로 변경…60분 2부작
최불암·강수연 부녀로…한인수 주연
신경림 시인을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신경림의 시는, 쉽고 편안하고 즐거움을 시상으로 삼아 역설적으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점점 황폐화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첫번째 시집 <농무>(1974년·창작과비평사)의 발문에서 백낙청 선생은 “시도 역시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말이요 또 사람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신경림씨의 작품들이 한 묶음 되어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반갑고 든든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는 ‘우리’의 이야기가 못 될 ‘나’의 이야기는 애써 피하고 인식의 혼란이나 감정의 낭비를 가져오기 쉬운 생소한 낱말들을 철저하게 솎아 버린다. 그의 운문은 산문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순탄하게 뜻이 통하면서도, 아무렇게나 바꿔 놓은 듯한 그 시행들은 산문으로 고쳐 놓았을 때 그 진가가 비로소 드러날 만큼 우리말에 내재하는 운율에 밀착되어 있다. 그리하여 <농무>를 비롯한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 … 신경림 시인은 시집 <농무>의 후기에서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이것이 이를테면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진 소박한 소신이었다. 그 결과, 한 용기 없고 소심한 자화상을 대하게 된다. 겁 많고 연약한 가락들은 내가 참으로 증오하는 터이지만, 이것들이 결코 내 참 목소리의 한가락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언제고 이것들을 내 몸에서 완전히 털어버릴 때, 그리하여 내 목소리가 좀 더 우렁차고 도도해질 때 나는 여러분 앞에 당당한 얼굴로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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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연말특집 드라마 <농무>에서 강도살인을 당하는 민속학자로 최불암(왼쪽),그의 딸로 강수연(오른쪽)이 출연했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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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은 농촌의 이미지를 쉽게 우리에게 환히 보여주고 있다. 상황시 ‘농무’엔 오랜 역사에서 빚어진 애사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의 현대사가 응축되어 있다. 반세기 앞에서 첨병처럼 뚜벅뚜벅 가고 있었다.
1984년 시집 <농무> 한권을 사들고 김상열 작가를 찾았다. 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김 작가는 ‘시’ 한편으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발상만으로도 해볼 만하다고 했다. 나아가 ‘신뢰 콘텐츠’를 만들어 불특정 대다수로부터 사랑받자고 했다.
‘베스트극장’은 처음이다. 간단한 기획안으로 결재를 올렸다. 표재순 제작본부장은 기획안을 훑어본 뒤 “이게 그냥 결재 올라왔어요? 체크하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해 “신경림 작품, ‘베스트’ 하겠다고 올라왔는데, 알아봐!”
누구한테 한 전화일까? 어디에 알아보라는 걸까? 지금의 정부가 기피하는 인물이 있다는 소문은 문화계에 횡행했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통제하는진 몰랐다. ‘블랙리스트’다. 조지 오웰이 1949년 발표한 근미래소설 <1984>, 빅브러더가 감시하는 무시무시한 ‘1984년’이 지금 한국에 투영되는 듯했다. 1984년의 정국은 숨막히게 경색되어갔다. 늦은 장마로 망원동을 중심으로 서울 일대에 물폭탄을 퍼부을 때 사람들은 말했다. “하늘은 전두환 편이 아니다.”
그에 앞서 3개월 전, ‘베스트극장’을 준비할 때였다. 윤정모의 단편소설 <길동무>를 골랐다. 용인에서 텃밭 가꾸며 산다는 윤 작가를 여의도 연세치과에서 만났다. 그곳은 그가 서울 오면 들르는 동호인들의 둥지였다. 윤 작가는 얼마 전 중편 <님>을 발표했다. ‘80년 광주’의 참상을 리얼하게 묘사하여 젊은 독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은 작품이다.
<길동무>는 6월6일 현충일을 맞아 역사기행을 다녀오는 문학애호가들의 버스 이동경로를 따라 기행문처럼 쓴 단편이다. 민통선을 지나 작전통제지역에 있는 ‘건봉사’를 답사한 뒤 ‘통일전망대’를 다녀오는 1박2일 코스. 지각하는 리영희 교수를 기다리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무려 40분을 지각한 리 교수는 입원해 있는 백기완 선생을 만나고 왔단다. 이 버스에는 리영희 교수(정욱)를 비롯해 이호철 소설가(최불암), 박현채 민족경제학자, 송기원 소설가, 김언호 한길사 대표 등 진보적인 문인들이 타고 있다. 건·봉·사. 한국전쟁 때, 인민군 2개 사단의 거점지역으로 찍혀, 동해 앞바다 미7함대에서 뿜어낸 엄청난 함포 사격으로 웅장한 사찰이 잿더미가 되었다. 건봉사는 전국 3대 명찰 중 하나였다. 건봉사를 뒤로하고, 멀리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끝자락이 손에 잡힐 듯한 고성 통일전망대에 와 있다. 낙타봉과 351고지를 바라보며 통일을 염원하는 일행은 희망차 보였다.
리영희 교수와 이호철 작가의 입담과 경륜이 도처에 배어나온다. 원작에 충실하게 잘 각색한 대본이 나오고, 출연진 읽기 연습도 흥미롭게 마쳤다. 다음날 아침 건봉사 역사기행처럼 관광버스에 연기자 좌석 배치하고 조명 장치하고, 지각하는 연기자 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후배 피디가 버스에 올라타 갑자기 촬영 중지를 전했다. 제작부장의 명령이란다. 도대체 부장이 무슨 이유로 제작을 중단시킨단 말인가. 어제 연습 이후 오늘 아침 사이 내부자가 작동한 것이다. 아주 특이한 제작방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제작부장을 만났다. 중단 이유, 배경, 명령자를 다그쳤다. 부장은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손톱만 툭툭 자르고 있다. 상처에 소금 뿌리고 있다. <길동무>의 압력은 아주 싱겁게, 촬영 직전에 제작 자체가 봉쇄된 웃지 못할 기록적 사건이다. 포기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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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드라마 <농무>는 애초 주간 단막극 프로그램인 ‘베스트극장’을 위해 기획했으나, 제작본부장이 안기부의 ‘사전 검열’을 거쳐 ‘연말특집’으로 바꾸었다. 민주화 인사로 ‘낙인’찍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신 시인은 훗날 “어떻게 내 작품이 검열을 통과했는지 의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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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본부장실에서 어딘가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농무>는 ‘베스트극장’에서 ‘연말특집’으로 둔갑해 순식간에 60분 2부작으로 확대되었다. “안기부에서 허락이 났다.” 제작본부장이 전화 통화 중 엉겁결에 한 말이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것이 안기부 허가사항인가? 1984년 가을의 일이다.
신경림 시인을 만났다. 원작료에 대해 회사 내부의 논쟁이 일어난 뒤였다. 편성과 경리 쪽에서는 ‘시’ 한편에 대한 원작료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학작품 원작료는 원고 매수로 계산하는 것이 질서였다. <농무>에는 단편소설의 50분의 1, 원고지 한장 몫, 즉 만원 정도밖에 줄 수 없다는 거다. 우기고 설득하여 최소한 단편소설 원작료 기준으로 양보하고 정했다. 이 비문화적 발상을 시인에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도 없고, 양해를 구하는 선에서 원작료를 드렸다. 시인은 웃었다. 나아가 문화계의 새로운 경험에 신기해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내 꼴이 창피하여 곧 헤어지고 말았다. 세실극장 지하 커피숍 앞을 지날 때면 내내 부끄러웠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특집극 농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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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농무>는 주인공(한인수)이 강도에게 살해당한 민속학자의 자료를 단서로 한국전쟁 때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당숙의 과거사를 밝혀내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각색했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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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의 실종사건을 맡은 장대팔 형사의 행적을 쫓아가는 스토리. 장대팔(한인수)은 고향의 당제에서 민속학자(최불암)의 연구자료를 발견한다. 여기엔 당숙(박종관)의 과거사와 함께 민속학자 장인의 과거가 드러난다. 후처(김해숙)와 딸(강수연)은 갈등에 빠지고 두 집안엔 파란이 일어난다. 장대팔의 가족사와 민속학자 집의 단순강도(정한헌) 사건이 얽히며, 살인으로 발전하는 우여곡절. 한 마을의 한 서린 아픔과 속죄의 긴 역사가 토속적 향기 속에 담담하게 그려진다. 6·25의 상처가 30년간 곪아 있다 터지며 응어리가 치유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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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마을에 은신해 있던 주인공의 부친(김길호)은 믿었던 사촌의 밀고로 끌려가 끝내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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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와중에 재산을 지키고자 주인공(한인수)의 부친(김길호)를 밀고해 죽게 만든 사람은 당숙(박종관)으로 밝혀진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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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농무>의 촬영장소 헌팅에 나섰다. 한편의 수필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시집 <농무>에 등장하는 지형지물에서 시상을 떠올려, 드라마의 이미지와 촬영의 조건을 일치시키는 특이한 촬영현장 답사 경험이다. 민속학자가 여행을 떠난 곳은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 “을지로 육가만 벗어나면/ 내 고향 시골 냄새가 난다/ 질퍽이는 정거장 마당을 건너/ 난로도 없는 썰렁한 대합실/ 콧수염에 얼음을 달고 떠는 노인은/ 알고 보니 이웃 신니면 사람”(‘시외버스 정거장’ 중에서)
막연하게 충청도 쪽으로, ‘목계장터’를 찾아서 길을 나섰다. 목계장터로 가는 충주 길은 편안해 보였다. 아득하게 잊어버렸던 고향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하고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가까이 보이곤 한다. 몇개의 고개를 넘어 나타난 삼거리엔 목조건물의 작은 초등학교가 보였다. 대로변에 정문이 나 있고 키 큰 플라타너스가 학교를 지키듯 버티고 서 있다. 차를 멈추고 학교의 전경을 들여다보았다. 평화롭다. “학교 마당을 벗어나면/ 전깃불도 나가고 없는 신작로./ 씨름에 져 늘어진 장정을 앞세우고/ 마을로 돌아가는 행렬은/ 참외 수박 냄새에도 이제 질리고/ 면장집 조상꾼들처럼 풀이 죽었다.”(‘씨름’ 중에서)
목계장터와는 다른 길이지만 들어가 보기로 했다. 2차선의 좁은 길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고 보니,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적당한 크기의 천수답이 소작농처럼 겸손하게 눈앞에 펴 있다. 그 길을 따라 뚝방이 있고, 거기엔 천렵하기 딱 좋은 냇가가 흐른다. 금방이라도 남생이 놀이의 노랫가락이 들리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인에게는 생활이 풍부하다. 전설의 신비가 있고, 흙냄새에 묻어 풍기는 생활의 땀 냄새가 있고, 민중의 숨결이 있다.”(문학평론가 구중서)
마을을 끼고 멀리 동쪽 산에 폐광 흔적이 보인다. 계곡을 타고 길게 석탄물의 검정 줄기가 있다. 이런 조용한 농촌마을에 탄광이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집엔 나와 있다. “자전거포도 순대국집도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모두 장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굴렀다/ 젊은이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고/ 처녀애들은 그 뒤를 따르며 노래를 했다/ 솜뭉치에 석유불이 당겨지고/(‘폭풍’ 중에서)
아주 조용하고 정감어린 우리의 농촌마을이다. 이발소 앞을 지나 점방, 순댓국집, 자전거포, 정미소는 그냥 열려 있고, 그 귀퉁이에 작은 우물과 펌프는 녹슬어 있다. 그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은 2층 높이의 소방탑이다. 계단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위에 오르면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찾는 산과 들, 논과 밭, 그리고 전설이 숨어 있는 듯한 작은 동산까지도 다 망라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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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농무>의 마지막 장면은 한국전쟁 때 집단학살당한 사람들의 위령제로 열리는 마을당제에서 다함께 농악을 울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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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농무’가 들려온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동네를 다 돌아보았다. 촬영 때 옮겨 다니지 않고 카메라만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지문들이 모두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대형 세트장을 대본에 맞추어 지어놓은 듯했다. 광선 조건도, 차량 통행도, 휴식 대기 공간도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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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농무> 한권만 들고 충청도 충주로 드라마 촬영 장소를 찾아나선 고석만 연출은 우연히 시에서 묘사한 마을을 발견했다. 특히 극중 주인공(한인수)의 집으로 설정하고 섭외한 농가는 실제로 신경림 시인의 고향집이었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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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타고 자란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평산 신씨 집성촌은 시집 <농무>의 무대이기도 했다. 1984년 드라마를 찍었던 시인의 고향집 앞에 지금은 ‘신경림 생가’ 팻말이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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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숙박시설이 없다. 철야를 하는 수밖에 없다. 꼬박 이틀은 밤을 새워야 마을 분량을 다 찍을 수 있다.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오동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그 옆 골목에 들어서니 아담한 초가 한채가 눈에 들어온다. 싸리나무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낙수가 떨어지면 화단을 적실 것 같은 작은 마당이 있고, 툇마루 쪽에서 비교적 트인 밖을 내다보니 앞집의 지붕을 걸쳐서 석양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에게 말씀을 드렸다. 이러이러한 ‘드라마를 이 마을에서 찍을 예정인데, 주인공 신경림 시인의 극중 집으로 이곳 툇마루와 마당에서 촬영을 하고 싶으니 허락해주십사.’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집이 신경림이 살던 집이요. 내가 신경림의 아재뻘이요.”
<농무> 시집 한권엔 신경림, 그의 생활,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를 따라 들어가 본 농민의 얼굴, 농민의 소리는 우리들의 이미지 세계까지 확장시켜주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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