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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고석만 피디는 이비에스(EBS) 사장으로서, 문화사 시리즈 다큐드라마 <명동백작>을 기획했다. 명동에서 자란 정하연 작가를 영입해 24부작으로 1950년대 문화·예술의 샘터였던 명동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해내 큰 화제를 모았다. 해설자(정보석)부터 시계 방향으로 시인 박인환(차광수), ‘명동백작’ 이봉구(박철호), 소설가 전혜린(이재은), 시인 김수영(이진우) 등 당대 명동을 풍미한 수많은 인물이 등장했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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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예술·문화 샘솟던 거리
‘명동 출신’ 정하연 작가 흔쾌히 호응
2004년 9월 EBS 첫 문화사 드라마로
‘명동백작’ 불리던 작가 이봉구 중심
1951년 폐허부터 61년 ‘5·16’ 때까지
시공관부터 다방·술집·거리 그대로
김수영·김현경·박인환·전혜린…
꿈과 열정 넘치던 수많은 예술가들
당대 톱스타 정보석 ‘해설사’로 등장
“전후 황폐해진 정신 어떻게 회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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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고석만 피디는 이비에스(EBS) 사장으로서, 문화사 시리즈 다큐드라마 <명동백작>을 기획했다. 명동에서 자란 정하연 작가를 영입해 24부작으로 1950년대 문화·예술의 샘터였던 명동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해내 큰 화제를 모았다. 해설자(정보석)부터 시계 방향으로 시인 박인환(차광수), ‘명동백작’ 이봉구(박철호), 소설가 전혜린(이재은), 시인 김수영(이진우) 등 당대 명동을 풍미한 수많은 인물이 등장했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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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47회) ‘EBS 문화사 시리즈-명동백작’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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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이비에스 드라마 <명동백작>의 주무대는 해방 이후 시공관이자 1950년 문을 연 중앙국립극장 일대였다. 1930년대 일본인이 지은 상영관 ‘명치좌’로, 지금은 ‘명동예술극장’으로 탈바꿈했다. 사진은 1959년 김천길 에이피통신 기자가 찍은 시공관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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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시대’가 있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찬란하게 문화를 꽃피우고, 1950년대를 뜨겁게 풍미한 명동시대. 그 한복판에 ‘시공관’이 있었다. 그때 시공관 무대에서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극이 펼쳐지고 있다. “김중배의 그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었단 마~아~알인가.” 눈물을 빼고 있을 때, 시공관 밖 골목에서는 종로 쪽에서 밀고 오는 김두한(강인덕) 패거리가 위풍당당하고, 반대편에선 퇴계로 쪽 골목을 막고 신상사파 일행이 대치하고 있다. 명동성당 내리막길엔 이화룡(최상훈) 일파가 신상사(전태성)를 지원하고 나선다. 주먹세계의 보혁 대결이다.
‘해방공간’을 뒤로하며 명동시대는 예술과 문화가 새롭게 생성되고 있었다. 그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 오랜 과제였다. 정하연 작가를 모셨다. 그는 어린 시절 명동에서 일하는 엄마를 쫓아 명동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용산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들어가 연극에 빠져 오화섭을 만나고, 명동의 시공관에 진출해 본격 연극에 심취했다. 정 작가만큼 명동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첫 제안에 흔쾌하게 응했다. 드라마를 하기엔 악조건인 이비에스(EBS)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놓은 역작이 <명동백작> 24부작이다. 2004년 9월5일 첫 방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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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다큐 드라마 <명동백작>은 1951년 3월 기자이자 작가 이봉구(박철호)가 전란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명동거리를 통곡 속에 걷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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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첫 장면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3월, 어두운 밤 도강증 없이 한강을 숨죽여 건너는 나룻배의 일행과 이봉구(박철호)를 그렸다. 카메라는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작가 이봉구를 따라간다. 그는 명동을 향하며 속으로 외친다. “애인보다도 더 보고 싶고 그리운 존재, 서울 떠나고 나서 하루도 꿈에 안 나타난 적이 없는 명동. 아. 명동!” 그러나 그가 찾은 명동거리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다. 무너진 건물 여기저기에 얼기설기 엮은 움막들. 그 사이로 굶주린 어린아이 하나가 이봉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눈물이 왈칵 솟는 것을 삼킨다. 그 순간 부서진 벽돌 더미 사이로 어느 주검의 발이 솟아나왔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봉구, 소리 없는 오열. “이게 명동이란 말이냐.” 이윽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이봉구.
명동은 한국전쟁으로 거의 다 부서졌다. 집과 거리만 폐허가 돼버린 것이 아니다. 명동을 가득 메우고 넘치던 사람들. 이름 없는 상인에서부터 꿈 많던 예술인들, 고독과 인내와 지조와 양심과 청춘과 낭만 속에서 때로는 울분에 쌓이고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삶의 환희를 노래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명동에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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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부터 1950년대 내내 명동거리는 전후 황폐해진 정신과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사진은 2012년 서울역사박물관의 ‘명동 이야기’ 특별 전시회때 소개된 50~60년대 시공관 일대 명동 거리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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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의 명동은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다. 부감으로 내려다보면, 시공관 자리부터 미도파백화점이 있던 큰길의 북쪽은 다행히 폭격을 면해서 전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진고개에 이르는 지역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돼버렸다. 그 바람에 폭격을 면한 저쪽 언덕 위 명동성당만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다. 불 꺼진 골목마다 모퉁이마다 슬픔과 애처로움만이 흐느끼는 상실의 거리였다. 이봉구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한 시공관 간판을 바라본다. “(부들부들 떨더니) 야… 너는 살아 있었구나. 너만은 멀쩡히 살아 있었어.” 시공관 간판을 쓰다듬으며 기쁨의 웃음을 터뜨리는 이봉구. “반갑다. 너마저 폭격을 맞아 쓰러져버렸으면 난 한강에 투신해버렸을 것이다.”
명동 한복판에 자리잡은 시공관은 우리 문화의 중심지였다. 예술단체들이 앞다투어 대관 신청을 하는 바람에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가령, 극단 신협이 유치진의 <원술랑>을 공연하는데 그 마지막 장면이 끝나기 무섭게 무대를 철거하고 내일부터 시작하는 오페라의 무대장치를 세우는 식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엔 <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리는 거다. 무대장치뿐이 아니라 낮 공연이 시작되기에 앞서 다음 공연팀이 무대 연습을 한다. 그러니까 ‘원술랑’ 세트 앞에서 ‘백조’들이 춤을 추는 거다.
“이봉구 선생님 아니십니까? 저 모르시겠습니까?” 시공관에서 ‘기도’ 보던 장씨(이종만)다. 등 뒤에서 나타난 장씨와 반갑게 손을 잡는 이봉구. “그런데 혹시 김수영이 못 봤어요? 아, 왜 눈썹 진하고 꼭 서양놈처럼 생긴….” (장씨 고개를 젓고) “그래요. 나 같은 놈도 살아남았는데 설마하니 귀신이 우리나라 보물들을 몽땅 잡아갔겠어요?”
이때, 정보석이 해설자로 등장한다. 정보석은 얼마 전까지 정 작가와 드라마 <신돈>을 찍은 톱스타다. <명동백작>은 출연료 탓하지 않고 우정출연 했으리라.
해설자 “이봉구, 주로 기자생활을 많이 했던 소설가입니다. 50~60년대 명동의 선술집과 다방 그리고 그곳에 드나들었던 예술가들을 주인공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소설을 많이 썼지요. 20년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명동이라는 성에 나가서 지키고 앉아 있던 이봉구.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명동백작’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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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이자 작가였던 이봉구는 1950~60년대 명동과 예술인들을 소재로 한 책을 3권이나 펴내 ‘명동백작’으로 불렸다.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술집 은성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말년의 이봉구 모습. 사진작가 김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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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평범한 서민들은 주말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전차나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나와 미도파에서 눈요기를 하고, 번화가를 스치며 청동·돌체·갈채·나일구다방, 송옥양장점 앞을 지나 한일관이나 삼오정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재수 좋은 날은 가수 현인이나 남인수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의 ‘명동시대’였다.
#이봉구가 ‘봉선화다방’ 앞에 선다. 뼈대만 남은 다방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부서진 의자와 탁자들, 바닥에 쓰러진 축음기가 시선에 들어온다. 회상에 젖는 이봉구의 얼굴에 ‘헝가리 무곡’이 흐르기 시작한다. 박인환(차광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담! 다른 판 좀 틀어. 그놈의 ‘헝가리 무곡’은 하도 들어서 이젠 귀에 딱지가 앉겠다.” “하루 종일 겨우 코피 한잔 팔아주면서 우리 다방 전세 냈습니까?(웃는다)”(김 마담) “인색하긴.”(박인환) “그건 내가 할 소리입니다.”(김 마담) 음악은 베토벤의 ‘합창’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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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등과 더불어 모더니즘 대표 시인 박인환은 19살 때인 해방 직후 명동에서 서점 마리서사를 열기도 했고 1956년 3월 이상의 기일에서부터 사흘간 술만 마시다 서른 한살에 요절함으로써 ‘명동 낭만 시대’의 상징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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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명동백작>에서는 시인 박인환이 죽기 1주일 전, 단골술집 은성에서 극작가 이진섭·테너 임만섭 등과 술을 마시다 즉석에서 쓰고 가수 나애심이 바로 불러 유명해진 ‘세월이 가면’의 탄생 장면도 재현했다. 극중 은성에서 박인환(오른쪽·차광수)이 이봉구(왼쪽·박철호)에게 짝패이자 연적이기도 했던 김수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은 장면.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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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속의 ‘봉선화다방’. 박인환, 이봉구, 김 마담이 차를 마시고 있다.
김 마담: 왜, 오 선생님 얼굴은 안 보이세요?
박인환: 혹시 우리 김 마담이 오장환 선배를 마음에 뒀던 거 아냐? 얼굴이 홍당무네.
김 마담: 사람 놀리지 마세요. 저는 다만 오 선생님 시를 좋아해서….
이봉구: 오장환의 어떤 시를 좋아했는데요?
김 마담: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박인환: 야! 우리 김 마담이 제법인데. 시를 다 외우고 있고….
김 마담: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냥 외워져요…. 짧은 시인데요.
이봉구: (선창하듯)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김 마담: (부끄러운 듯 주춤하다가)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박인환: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 놓아 울리라.
김 마담: 거북이여. 느리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이봉구와 박인환도 같이)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세 사람의 웃음소리 가득)
#이봉구의 또 다른 회상. 인민군 치하 90일의 여름, 문학가동맹 사무실에 많은 문인들이 끌려와 있다. 오장환이 그들에게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의 ‘붉은 깃발’을 부르게 하고 있다.
이봉구: “야. 오장환!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낸다. 비애야!… 이건 빨갱이가 쓴 시가 아니잖아?” 오장환은 싱긋 웃더니 “저무는 역두에서 보낸 게 내 애인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나? 그건 애인이 아니라 혁명투사야. 비애는 장엄한 혁명의 상징이고.” 반쯤 소리 내어 웃으며 이봉구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가는 오장환. 그 뒷모습 바라보는 이봉구. 눈물이 글썽해서 “이건 아냐. 이건 오장환의 모습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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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명동백작>에서는 ‘자유와 저항의 시인’ 김수영과 ‘연인’ 김현경의 사랑 이야기를 비중있게 그렸다. 1961년 여동생의 졸업식에서 함께 한 가족들. 왼쪽부터 부인 김현경·모친 안형순·여동생 김수명·김수영·남동생 김수환.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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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드라마 <명동백작>에서 김수영(이진우)·김현경(김성령) 부부. 한국전쟁 와중에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1954년 김수영에게 다시 돌아온 김현경은 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보낸 이후 지금껏 ‘시인의 연인이자 동반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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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구의 회상 속 어두운 밤. 김수영(이진우)의 집 앞.
이봉구: “며칠 전에 서울사대 교수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김기림을 을지로 입구에서 웬 청년들이 불문곡지 지프에 태워가지고 끌어갔다는 거야. 그리고 정지용, 박계주, 박영준 등 문학가동맹 지시로 정치보위부로 자수하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구속됐대. 몸 조심해!” 안에서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김성령)이 배가 불룩해서 나온다. 이봉구는 손을 내젓고 사라진다.
김수영: “빨갱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는군.” 집으로 들어가는 김수영과 김현경.
그 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을 발견할 때까지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김수영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1950년대와 명동시대를 말할 수 없다. <명동백작>은 오늘의 평론가 권영민·김병욱·정석주 등을 통한 증언도 삽입했다.
해설자: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떨어진 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폭탄보다도 더 많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건물의 벽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는데… 남한이라고 해서 그 폭탄 세례를 피해 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인해 철저히 부서져버렸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가족, 분열과 이별과 삶에 지친 수많은 의심들, 집은 다시 짓고 끊어진 다리는 다시 이어주면 그만이지만 우리의 황폐해진 정신은 무엇으로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드라마 <명동백작>에서 끊임없이 추적한 핵심 주제였다.
이봉구: (취했다) “이 명동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명동은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곡창지대다, 그 말입니다.” 이봉구의 외상 술값도 갚아주던 ‘두목’ 이화룡이 부하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같은 깡패나 장삿꾼만 들끓으면 명동바닥이 천해진단 말이다. 사람 냄새가 나야지!” 이화룡의 뒷돈은 요정 청운각의 마담인 친누이(김자옥)가 대줬다. 최불암의 어머니(이명숙)가 하던 술집 ‘은성’.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외상장부만 가득한데 모두가 암호였다는 명동의 인심이 눈물겹다. ‘명동을 모르고 이 땅의 문화를 이야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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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명동백작>에서 1950년대 종로의 김두한에 맞선 명동파의 두먹 이화룡(최상훈)은 명동 거리에서 주먹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예술인들을 후원한 ‘의협꾼’으로 등장한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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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11%%] 사실, 김수영은 인민군 치하에 의용군에 끌려갔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내 김현경은 슬픔에 빠지고, 위로하던 이종구(영문학자)와 부산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이종구는 김수영과 김현경을 맺어준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전투 중 북한군으로 오인되어 유엔군의 포로가 되었다. 거제도 수용소에서 미군 장교가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있냐고 해서 손을 들었더니 아는 영어 다 해보라 해서, 엘리엇의 시 한편을 영어로 읊어주었더니 까무러치듯 놀라며 대우해주더란다. 거제도 수용소 13만명의 포로들은 친공-반공으로 나뉘어 싸웠다.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이데올로기라는 미명하에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추악한 존재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토막 난 시체가 변소에 버려지는 것도 보았다.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잔인해져야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갈기갈기 찢긴 시인의 영혼 속에 50년대가 흘러가고 있었다.
[%%IMAGE12%%] 1953년 7월 휴전 이후, 하나둘씩 명동을 다시 찾아오고 있다. 공초 오상순은 그의 허무를 담배 연기 속에 내뿜어대고, 그 담뱃갑 은박지에 이중섭은 슬픔을 새기고 있다. 저기 무용학원에서 발레를 하고 있는 송범도 보이고, 부채춤을 추고 있는 김백봉도 보이고,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 연습하는 임만섭도 보이고, 김동원이 ‘햄릿’의 독백을 읊고 있고, 임춘앵과 김진진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자유영혼 전혜린이 “여성 존중”을 주창하고, 천상병이 “가난해서 찬란하게 빛나는 시인”을 노래할 때, 박인환도 기염을 토하고 있다. “풍성한 목덜미의 아름다운 여인이다/ 애정의 손톱자국도, 화류계의 독소도 모두/ 화강암 살결에선 미끄러지고 무너진다.” 비단, 보들레르의 탐욕이 흘러넘치는 시가 아니더라도 윤동주의 뼛속까지 스미는 외로움과 슬픔이 아니더라도 명동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해설자: “김수영은 혼란을 통해서 자유가 온다고 했습니다. 4·19혁명 이후 일년 남짓한 혼란을 참지 못하는 그들은 어쩌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나 봅니다.”
[%%IMAGE13%%] 그들은 ‘5·16 쿠데타’를 터트렸다. 김수영은 오들오들 떨며 벽장 속으로 숨어들었다. “반공한대. 군인들이 반공하겠다고 탱크를 몰고 들어왔대잖아. 반공은 이념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이념이다. 반공은 사상이 아니다. 자유가 사상이다.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폭력이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 자유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한동안 행방을 감췄다. 김현경이 남편 김수영의 사고 소식을 듣고, 10년간의 말 못 할 아픔을 쏟아낸다. “편하라고, 사람 태우고 다니는 게 버스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사람 다니는 길로 뛰어들어 그냥 앉아 있는 사람을 죽여요?” 5·16 쿠데타가 딱 그 형국이다. ‘5·16’으로 명동시대는 끝났다. 이 땅의 예술이 말살당했다.
[%%IMAGE14%%] 정하연 작가와 이창용·남내원 연출이 열정과 눈물로 그려낸 <명동백작>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명동을 누비고 다니던 수많은 예술가들, 그들의 정신과 슬픔과 꿈과 미래가 아직도 우리의 어딘가에 남아서 같이 숨 쉬고 있으리라 믿는다.
집필 고석만 피디,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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