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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9 02:42 수정 : 2018.12.29 10:25

2018년 1월6일치부터 1년간 매주 토요판에 연재해온 ‘길을 찾아서-고석만의 첨병’이 50회로 막을 내린다. 2007년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 선임된 고석만은 직후 대선에서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부터 퇴진 압력을 받았다. 2008년 내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블랙리스트’에 시달리다 이듬해 초 결국 물러났다. 사진은 2008년 4월 콘텐츠진흥원을 방문한 문체부 장관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는 고석만 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월남 참전 때 겪은 ‘첨병의 전사’
“절대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김기팔 작가의 꿈 ‘민주주의 첨병’
“모든 억압 해방된 성숙한 사회로”

60분짜리 1천편 넘는 드라마 연출
“한국 사회 변화 그린 ‘수난의 역사’”
비장의 기획안 ‘10여편’ 후배들에 공개
‘백남준과 방탄소년단’ ‘중앙정보부’
‘아! 윤이상’ ‘김홍도와 우키요에’…

MB정권 콘텐츠진흥원장 ‘퇴진’ 압력
국무총리실 직원들 심야 원장실 ‘뒤짐’
“이 새낀 골프도 안하고 술도 안 마셔?”

2018년 1월6일치부터 1년간 매주 토요판에 연재해온 ‘길을 찾아서-고석만의 첨병’이 50회로 막을 내린다. 2007년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 선임된 고석만은 직후 대선에서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부터 퇴진 압력을 받았다. 2008년 내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블랙리스트’에 시달리다 이듬해 초 결국 물러났다. 사진은 2008년 4월 콘텐츠진흥원을 방문한 문체부 장관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는 고석만 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50회) ‘에필로그-못다 한 이야기’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매복작전이 끝나기 10여분 전이다. 월남전에서 매복작전은 일과에 다름 아니다. 사단이나 연대 작전이 없을 때는 일주일에 두세차례 철야 매복작전으로 적의 보급선을 통제하는 것이 일상이다. 옆 호에 푹 박혀 있는 녀석은 파병 동기다. 녀석이 신호줄을 잡아당긴다. 생명줄이라 불리는 이 줄은 호와 호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노끈이다. 녀석은 오늘 우리 분대 첨병이다. 빨리 철수하자는 거다. “네가 선임 하사에게 말해!” 해 뜨기 20분쯤 전. 클레이모어를 분해하고 철수가 시작되었다. 녀석이 맨 앞에 서고 우리 분대 9명은 8부 능선으로 짐승들의 길을 따라 내려간다. 여기서 부대까지는 15분 거리. 본대와 첨병 간의 거리는 10미터. 녀석은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부른다. 10미터 뒤에서도 들린다. ‘흥흥~흥~’ 그 순간 ‘땅!’ 한방. 그리고 천지가 흔들리는 듯 부비트랩 지뢰가 터진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모두 납작 엎드린다. 정상 능선에서 후두두둑 새처럼 적들이 없어질 때, 앞에 엎어진 녀석이 외마디 신음과 함께 꿈틀거린다. 미명의 어둠, 첨병의 흥얼거림 소리에 지향사격한 것에 맞았고 쓰러지며 지뢰를 밟아버린 것이다. 하늘에서 가라앉는 흙먼지를 맞으며, 뿍뿍 기어서 녀석을 잡았을 때 그는 푸드득거렸다. 왼쪽 심장 밑 아랫배가 날아가고 없다. 또 한번의 푸드득거림 끝에 숨이 멈췄다. 순식간의 일이다. 선임 하사가 다가와 지켜본 뒤 군번표를 휙 뜯어버린다. 첨병이 죽었다.

모두가 다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녀석을 둘러메었다. 무거웠다. 한발 한발 떼기조차 어렵지만 그를 두고 갈 순 없다. 부대까지의 길은 험악하진 않았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허벅지를 잡아 어깨에 멘 채 15분길을 30분에 걸쳐 하산했다. 녀석은 마포에 산다는 ‘가시내’ 이야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곧 해가 뜨고, 뜨겁게 비추고, 내 몸은 오른쪽 어깨부터 군화 속까지 철갑처럼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부대에 도착하여 의무실 앞에 던지듯 내려놓고 맞은 편 막사 그늘에 쓰러졌다. 의무실 문이 열리고 의무병이 내다보더니 곧 거적으로 덮어버린다. ‘인간이, 거적 한장인 것을’,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이틀 낮밤을 죽은 듯이 자더란다. 너무 열이 심해 군의관이 와서 진단하니 그사이 말라리아가 지나갔다 한다. 잠에서 깰 즈음 꿈을 꾸었다. 고향 전주 한옥마을의 골목이 보였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회색빛이다. 골목, 골목길들은 비틀어져 약간씩 흔들렸다. 저쪽 멀리에 늙은 황구가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원해 온 베트남전에서 죽음은 완전 개죽음이다.’ “살아서, 절대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1981년 <제1공화국>을 기획할 때부터 우리는 ‘첨병’을 자임했다. 김기팔 작가와 처음 만난 지 벌써 38년이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27년이나 지났다. 그가 두려워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가 그리고자 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만나고 헤어질 때까지 주고받은 명제들이다.

‘왜 다수가 소수의 지배를 받는가.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문명은 어떻게 발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사물과 만나는가. 사회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삶의 부조리는 고통만을 낳는가.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미디어는 정치적인가.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민주적 열린 사회는 가능한가.’

의심의 철학이 끝없이 발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길 때, 왜 그것이 당연한지 의심하고 질문할 줄 아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면 전체주의가 되고 다양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면 민주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광장과 시장에 퍼트린 사람들이 민주사회를 열었다. <제1공화국>의 주인공은 민주주의다. 그 뒤 일관되게 우리의 주제는 ‘민주주의’였다. <땅>에 이르러 민주주의는 죽었다. 김기팔 작가의 부활을 기원했다. 민주주의의 부활을 기원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내놓고 비판할 수 있어도, 눈앞의 부장이나 사장은 그럴 수 없다. 광장의 거시권력보다 일상의 미시권력이 더 무서운 것이다. ‘가면 민주주의’는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 연대가 실종된 사회, 감시가 전면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가면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인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뒤늦은 혁명이 이 땅에 도래했다. 여성 인권부터 갑질 철폐, 장애인, 동성애자, 난민 등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성숙한 민주사회. 그것이 김기팔 작가와 함께 그리고 싶었던 나라였다. ‘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1986년 독일 헌법재판소)

‘첨병’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동안 내가 연출한 60분짜리 1천편이 넘는 분량의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수난의 역사’였다. 올 한해 ‘길을 찾아서’에서는 1970~90년대 제작 현장을 ‘첨병’의 시각으로 정리했다.

첨병을 위한 길은 따로 없다. 첨병에겐 산 너머를 보는 나침반과 발끝에 달린 눈과 동물적 감각뿐이다. 첨병은 마중물, 물꼬 같은 것이다. 누군가 해야 하는데 하고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다 보니 전문성이 생기고 믿음도 생겼다. 믿음, 홍해에 맨 먼저 발을 내딛는 사람의 믿음이 바다를 갈랐다. 다행히 작가 복, 스태프 복, 배우 복은 있었다. 이 천혜의 복을 부른 힘은 사랑이다. 그러나 방송사 고위층에게 첨병은 소모품이다. 도중하차 시키는 부역자, 내부자들은 회상성 기억 조작, 상습적 범행자이다. 그러나 연민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도 가치관과 삶이 있다.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판단이자 선택이다.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이 나를 울게 하였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삶 앞에, 문제 앞에 용기있게 서는 사람이다. ‘바르게 사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의 ‘바르게’는 다른 측면의 의미도 갖는다. 삶의 이상과 정신의 품위를 정향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주의적 오만일까?

그동안 기획안을 제시했지만 불통되거나 부결된 드라마 소재들과, 변화된 시대에 ‘첨병’이 바라본 소재 10여편을 후배들을 위해 공개한다. 자식 같은 놈들이다. 극단적 오락만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돌파구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길을 찾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만물은 무, 비움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된다.’

‘상처받은 용 윤이상’은 고석만이 피디 초년병 때부터 지금껏 구상해온 대표적인 미완의 작품이다. 1967년 7월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강제귀국해 수감된 윤이상(왼쪽)이 이듬해 부인 이수자(오른쪽)의 부축을 받으며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아! 윤이상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가와 장기 독재자의 날실과 씨실 교직. 새롭지만 낯설지 않고 서럽지만 애절한 희망을 담은 윤이상과 이수자가 돌아왔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꿈꾸게 만든 ‘화로’ 같은 윤이상의 이야기 ‘상처입은 용의 꿈’.

■ 백남준이 방탄소년단을 만나다

문화 장벽을 허문 ‘방탄소년단’(BTS), 50년 전 백남준을 보는 것 같다. 둘의 유전자(DNA)가 똑같다. 그들이 오자 뉴욕이 지하철까지 늘렸다. 밀레니얼 세대가 본 백남준 플럭서스 운동. 앵글로색슨의 비틀스와 동방의 방탄소년단이 예술의 세계에서 자웅을 겨룬다. 그 사이에 노벨 문학상의 밥 딜런과 퀸이 있다. 복합구성의 기발한 뮤직 다큐드라마.

고석만 피디가 공개한 기획안 ‘백남준과 방탄소년단 만나다’는 백남준이 1969년 미국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비디오 아트를 선보인 지 반세기 만인 올해 한류 세계화의 정점을 찍은 ‘케이팝 신드롬’에서 착안한 것이다. 1971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 모인 존 레넌(왼쪽부터)과 오노 요코 부부와 백남준, 백남준 작품의 기술담당 아베 슈야.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 소장.
방탄소년단은 지난 10월 세계 최정상 스타들의 무대인 뉴욕 시티 필드 스타디움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공연하며 ‘케이-팝’의 세계화를 확인시켰다. 전 날부터 텐트촌을 이루며 5만여명 관중이 몰리자 뉴욕시가 지하철 운행 시간을 연장하는 등 대성공을 거뒀다. 사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중앙정보부(KCIA)

중앙정보부 설립, 오히라 메모, 공화당 창당, 김용순 45일 재임, 육사 8기 수난, 제이피(JP)계 40명, 김형욱과 김종필, 자민당 분쇄작전, 한일협정, 6·3사태, 인혁당 사건, 윤보선 암살 음모, 윤필용과 테러 충성, 피스톨 박 도청 사건, 3선개헌 작전, 초산테러 사건, 오세응 제거 음모, 정인숙 사건, 오적 사건, 엄창록 포획 작전, 청와대 초밥 진상, 이후락 평양 밀행, 4·8항명, 궁정동 유신공작. 하나회 시련, 김대중 납치사건, 육영수 저격 사건 비화,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동경 폭격론의 진상, 동아일보 광고 탄압, 전두환의 집념, 기무사 쿠데타 문건…. 중정·안기부·국정원을 관통하는, 오늘날 적폐의 온상이자 척결 1순위 집중 분해. 50부작 사건별 단막, 혹은 현시점에서 사건별 추적, 혹은 <웨스트윙> 스타일의 연속극.

■ 착한 사람 문성현

뒤늦게 찾아온 68혁명과 소외자들. 한 장애인의 일생과 그의 어머니의 일생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윤영수 단편소설. 실제 장애인과 비장애 연기자의 융합으로 드라마의 새 공간 창조.

■ 하지 시대

통역의 정치 시대, 한민당의 정치 횡행, 한·미 현대사의 단초.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오역의 정치 현장, 요절복통의 코미디, 정치의 희화화가 시사하는 정치 비판 드라마.

■ <땅>의 부활

네번이나 부활을 시도했다. 지금도 통회(痛悔)하고 있다.

■ 독립운동 연작 기획 4부작

<김산의 아리랑>, 님 웨일스의 원안을 승화시킨 아나키스트 김산의 독립운동기. <김구와 미국 전략정보국(OSS)>, 무력항쟁을 통한 영토 회복만이 광복이라 주창한 김구는 테러리스트인가? <의병시대와 서민 출신 신돌석 장군>, 양반의 독립과 서민의 독립은 무엇이 다른가? <왕산일가>, 법무부 장관이 무릎 꿇고 훈장을 추서한 전설적 독립운동가와 후손들. <황옥 경부>, 밀정 황옥과 동생 황직연 그리고 손자 황정하에 이르는 전설적 항일투쟁기.

1794년 5월부터 돌연 일본에 등장해 10개월 동안 140여점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남지고 사라진 도슈사이 샤라쿠가 김홍도라는 가설은 흥미로운 드라마 소재의 하나다. 왼쪽부터 이영희의 저서 <또 한 사람의 샤라쿠>, 김홍도의 자화상, 샤라쿠의 대표적 우키요에 ‘스모 선수’.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 김홍도 추적기

김홍도의 유럽 잠행기가 과연 유럽 미술사조를 바꿨는가. 일본 민화 ‘우키요에’의 비밀을 밝힌다.

■ 현악 6중주

‘고석만, 이근안을 쫓다’ 한마디에 좌초된 드라마. 고문기술자와 그의 딸, 르완다에서의 해후. 이 시대적 비극의 압축판. ‘박종철은 아직도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다.’

2007년 엠비시에서 한계를 곱씹고 있을 무렵 헤드헌터가 찾아왔고,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원장에 추천되었다. 치열한 경쟁이 붙었고, 심사 끝에 선발되었다. 그해 10월. 취임식에서 100년 수명의 콘텐츠를 만들자 제안했고, 실무를 바탕으로 진흥과 현장의 접목을 시도했다. 한류의 기초를 다지고 중국·일본·미국에 전진기지를 구축했다. 중국 국가광파전시총국(SARFT)을 집중공략하고, 미국의 윌리엄 모리스와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그해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인수위가 출범했다. 인수위에서는 현재 9위인 한국의 문화콘텐츠 세계 랭킹을 ‘5년 후 5위까지 올리겠다’ 발표하란다. ‘불가능한 일’이라 했더니 ‘콘텐츠진흥원장을 그만두라’ 한다. ‘그래서 그만두면 이 정부는 코미디가 되지 않겠는가.’ 문화는 가파르게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우선 문화예술인의 복지 문제에 접근, 국회에 ‘복지기금’, 즉 판매되는 전자기기에 0.01%의 문화복지기금을 매기자는 제안과, ‘음반 저작권의 균등 배분’, 즉 현행 85:10:5를 3:3:3으로 배분하여 5%밖에 되지 않는 실연자의 복지 배당을 균등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실행되고 있는 기초적인 생계 수단 장치 아닌가? 음반 제작사와 전자기기 제작사의 집요한 로비는 국회 상임위 상정조차 막은 지 오래되었다.

2010년 7월 정인(JI)프로덕션 이지나 사장이 목숨을 끊어 충격을 줬다. 2004년 대하드라마 <토지>를 제작한 뒤 파산 지경에 이른 그는 재기를 꿈꾸며 백방으로 자금줄을 찾아 헤매다 정치권과 연결되었다. 마지막 타결 단계에서 전 국회의원의 심한 리베이트 요구를 받았다. 그 여성 의원은 60% 리베이트를 요구했고 일주일 뒤 30%까지 조정하기로 했다는데, 그 다음날 이 사장은 떠났다. 겨우 마흔살. 오히려 홀연하고 결연한 떠남이다. 2011년에도 옥탑방에 살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홀로 굶어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러나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의 블랙리스트가 문화계를 휩쓸었다. 2008년 초반부터 문화부 산하 기관장들, 김정헌·정은숙·황지우·조선희·고석만 그밖에도 10여명의 명단이 돌았다. 작성자도 추측되고 실행 수법도 알려져 있다. 야밤에 콘텐츠진흥원장 사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3명, 온 방을 다 뒤지고 툭툭 털어 아수라장을 만든 뒤 ‘국무총리실 ○○○’ 명함 한장 던져 놓고 가면서 “이 새낀 골프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셔?” 했다. 다음날 아침, 숙직 간부의 보고는 눈물을 머금고 있다. 한승수 총리에게 항의하니 모르는 일이라 한다.

그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인연 깊은 직계 후배였다. 믿었던 그가 ‘블랙리스트’ 압력에 밀려 내 등에 칼을 꽂았다. 암살의 시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을 때, 가족이 사랑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한겨레>가 드라마의 수난사를 글로 쓰도록 했다. 나홀로 기억과의 전쟁을 겪으며 몸서리쳤다. 학살당할 충분한 이유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폭로하고 싶은 부역자들의 어떤 거짓말, 그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그제야 좀 떨어져서 볼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충전되는 것이다. 화려해 보이지만 이 완전히 실패한 인생 이야기가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대필도, 윤필도, 첨삭도 하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졸문을 지면에 내주고, 읽어주신 여러분께 허리 굽혀 인사드린다. <끝>

집필 고석만/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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