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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의 한장면<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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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놉시스를 쓴답시고 여기까지 썼다. 나보다 글 잘 쓰거나 나를 괴롭히는 놈들을 죽게 해서 속은 후련한데 범인은 누구로 한다지? 김아무개 기자를 연쇄살인자로 만들어? 신혼의 단물이 아직 덜 빠진 그 초보 아줌마에게 살인 동기를 어떻게 부여하지? 맞다, 후최면! 김아무개는 후최면에 걸려 누군가에게 “너 얼굴 크다, 아무개보다 얼굴 크다”는 말만 들으면 꼭지가 돌아 그날 밤으로 살인을 하는 거다. 그럼 누가 후최면을 걸지? 그래, 내가 걸면 되지. 내가 다중인격자이면 된다. 낮엔 멀쩡하다가 해질녘에 잠깐 또라이가 돼 김아무개에게 이렇게 속삭이는거다. “대충 까짓거 죽이면 되잖아.”
여하튼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다 치자. 돌 맞지 않을까? 내가 관객이라면 돌을 던지겠다. 나는 연쇄살인물 류의 스릴러 영화에서 ‘다중인격’ 또는 ‘후최면’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 버릇처럼 눈살을 찌푸린다. 이 두 가지는 만병통치약이어서 어떤 모순된 설정에도 끌어다 쓸 수 있지만, 그때문에 영화와 관객 사이의 공정한 추리 게임을 방해한다. 영화 속의 다중인격자나 후최면에 걸린 이는 평소에 멀쩡하다가 갑자기 살인마가 되고, 그 직후 다시 멀쩡해지고, 그걸 그 자신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합리적인 추리 대상이 될까? 물론 더 정교하게 플롯을 짜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지금까지 이 두 변수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십중팔구는 나중에 영화가 일방적으로 “얘가 범인이었어”라고 선언하고, 관객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는 경우였다.
후최면을 핵심 변수로 사용한 한국영화
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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